처음으로 혼자가 된 순간
0. 여행 준비
집에 붙어있는 가구 수준으로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나는 의외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21살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해 언니와 함께 떠난 일본 오사카를 시작으로, 가족과 함께 떠난 사이판, 그리고 23살에 혼자 떠난 유럽. 여행은 겁이 많던 내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용기였다.
내 용기는 여러모로 다양하게 필요했다. 나와 한 몸인 강아지를 두고 약 두 달 동안 유럽을 가는 것부터가 시작이었지만 다행히 내겐 시간이 많았다. 여행을 할 때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기를 조금씩 얻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용기를 갖게 해 줬던 건 여행 계획표였다. 걱정이 많은 나는 갑작스레 사고라도 날까 엑셀로 꼼꼼하게 여행 계획표를 만들어 아빠에게 건네기도 했다. (사고 나면 날 찾아달라고) 고작 엑셀 파일 하나를 아빠한테 넘겨준 것이었는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든든했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하는 가족, 강아지, 친구들의 사진을 모아 카드 목걸이를 만들었다. 함께 다니면 힘이 날까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여행에 필요한 용기들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유난스레 귀여웠다.
1. 여행 시작
집에 대한 집착이 있던 나는 여행을 가기 전까지 두려움에 괴로워한다. 설레기도 바쁜 유럽 여행에 이게 무슨 똥 같은 말인가 싶지만 말 그대로 나는 설렘과 떨림을 넘어 긴장을 하고 그로 인해 몸이 아파온다. 안정적인 집을 떠나 이탈리아 베니스로 가는 비행기 안,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괴로워하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걸 토해낸 기억이 있다. 사람마다 여행의 시작은 다 다르겠지만, 나의 시작은 긴장이 풀린 채 모든 걸 게워내고 침대에 털썩 누웠던 순간, 그때가 여행의 진짜 시작이었다.
2. 이탈리아 베니스
처음으로 혼자가 된 순간이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돌아오는 부모님도, 따뜻한 내 침대도 없는. 오롯이 혼자가 된 순간을 난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처음 느꼈다. 그곳은 아메리카노보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고, 음식은 죄다 짜기만 했다. 풀리지 않는 긴장에 속이 좋지 않았던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고작 마트에서 파는 과일 한쪽. 이러다 굶어 죽겠다 싶을 때쯤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을 계속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하고 3일 동안은 계획한 대로 모든 관광지를 봐야 하는 마법에 걸린 듯 정말 쉬지 않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러다 결국 몸살이 났다. 여행 초보자의 흔한 실수였다.
3. 이탈리아 피렌체 (1)
피렌체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한 밤과 주황빛의 조명이 피곤한 나를 반겨줬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로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간 게 기적에 가까울 만큼, 그때의 나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체크인을 하고 어떻게 잠을 잤는지 모를 만큼 피렌체 첫날은 그렇게 흘렀다.
아침이 되어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알람이 없었던 내게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는 자연스러운 모닝콜이었다. 아무리 푹 자도 힘이 안나는 날이었다. 호스텔에 있던 모든 숙박객들이 떠나고 홀로 남아 캐리어 속에 있는 옷들을 정리하는데, 괜히 빨래를 하고 싶어 호스트에게 물었다.
"근처에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있어요"
"감사합니다"
짧은 의사소통을 하면서 그날 처음으로 호스트의 눈을 봤었다. 갈색 눈의 입꼬리가 가볍게 위로 올라간 웃는 게 매력적인 멋진 여자였다. 호스트가 추천해 준 코인세탁소에는 동양인이 나뿐이었다. 줄 이어폰을 낀 채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 서 창문 밖을 구경했다. 나 빼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 나도 움직여야 하는데..'
그런데 내 몸은 더 이상 돌아다닐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빨래를 기다렸다. 젖은 빨래를 들고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가니 호스트는 나를 위해 빨랫줄을 매달아 두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내 빨래를 함께 널어주기까지 했다.
"내가 제일 잘 만드는 커피예요. 부드러운 거품이 올라간 카푸치노. 간식 먹을래요? 토스트가 있는데. 기다려봐요, 오렌지 주스도 같이 줄게요."
호스트는 정말 따뜻했다. 힘없이 빨래를 하던 어린 외국인이 가여웠던 걸까. 에너지가 없던 내게 토스트와 커피까지 주었고, 이야기 상대까지 해주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따뜻한 햇살과 함께 거실에 앉아 서로 사는 이야기를 했다. 뜨겁지 않은 오전의 햇살 같은 곳, 뜨겁지 않은 오전의 햇살 같던 사람. 그 사람이 내게 피렌체의 따뜻한 첫인상을 만들어줬다.
4. 이탈리아 피렌체 (2)
온몸이 방전된 이후 여행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여행을 해야 하는 거지? 누굴 위해 이렇게 다녀야 하는 거지? 답하기 어려웠다. 애초부터 바보 같은 질문이었으니까.
호스트의 따뜻한 인사를 받으며 에코백 하나를 들고 두우모 성당을 향해 걸었다. 방금 깬 눈으로 이탈리아 피렌체 거리를 걷고 있으니, 그제야 난 내가 외국에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성당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서서 거대한 건물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핸드폰을 꺼내 인증샷을 찍을 생각도 없이 멍하니. 이게 여행이구나 깨달았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치며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네"
"멀리서 그쪽만 보였어요. 혼자 가만히 서있길래.."
그제야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가만히 서있었던 건지 생각하게 됐다. 민망함에 하하하 바보같이 웃자 그 사람이 내게 말했다.
"혼자 오셨으면, 같이 성당 보러 갈래요?"
"(갈 생각은 없었지만..)네 좋아요"
그게 내 첫 동행이었다.
그 여자는 나보다 키가 컸고, 당당했으며 굉장히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나와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 어색할 법도 했지만 그때의 난 신경 쓸 힘이 없었다. 성당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내내 우리는 서로 말없이 구경만 했다. 사실 말을 할 수도 없게 만드는 엄청난 내부였던 터라 그럴만했다. 성당을 다 보고 나온 후 여자는 내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유는 정말 피곤해서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대충 때우고 잘 준비를 하려던 순간. 내 옆 침대에 있던 또 다른 한국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야경 보러 가실래요? 제가 오늘 마지막 날이라서요."
"(잘 준비는 다 했지만..)네 좋아요"
갑자기 생긴 두 번째 동행으로 잠옷을 침대에 던져놓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혼자라는 이유로 위험한 밤에는 나가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동행으로 야경을 보러 간다니 발걸음이 살짝 설렜다. 나는 신이 주신 '길 눈'으로 지도를 잘 보지 않고도 어두운 길을 잘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피곤하면 용감해지는 편이기에 술에 취한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도 뚜벅뚜벅 잘 걸었다. 그렇게 신이 주신 길 눈과 피곤하면 용감해지는 완벽한 조합으로 평소라면 겁을 먹었을 야경 스팟에 가뿐히 도착할 수 있었다.
소소한 스몰토크를 하며 계단에 앉아 야경을 보는데, 한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첫 번째 동행이었다. 당당했던 여자는 역시나 많은 한국인 친구들 사이에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날 나는 두 명의 동행을 만났고, 두 번의 계획 없던 여행을 했다. 예상치 못한 여행은 신기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5. 이탈리아 로마 (1)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던 기차 안. 내가 끊어놓은 좌석에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표를 아무리 봐도 내 좌석이었고,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니 할아버지는 머쓱하게 내 눈을 피하기만 했다. 당당하게 말을 하면 되지 않나 싶지만, 말 못 한 나만의 이유는 분명했다. 기차가 만차였다. 그리고 입석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내 자리에 앉아있던 나이 많은 할아버지한테 가서 "제 좌석이에요. 일어나 주세요!"라고 말하기엔 내가 못된 어린이가 될 것 같았다.
'에휴, 그냥 서서 가자..'
결국 나는 통로 끝 창문에 기대 로마로 향했다.
자리를 뺏겨 서운했던 탓이었을까. 로마의 첫인상은 더러움이었다. 생각보다 정말 더러웠고, 사람들이 참 많았으며, 걸을 때마다 엄청난 유적지가 보이는 알다가도 모를 동네였다. 피렌체에서 너무 따뜻한 시간들을 보내서 그랬을까. 북적이는 로마가 피곤하기만 했다. 결국 사람 없는 곳들을 향해 걷다 어느 허름한 놀이터 앞에서 파는 피자집에 들어가 피자 한 조각을 사서 놀이터 의자에 앉았다. 그곳이 어디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흔한 유적지 하나 없는 로마에 어떤 동네였다. 조금씩 여유가 느껴지자 주변을 천천히 살필 수 있었다. 허름한 놀이터에선 어린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았고, 바로 옆 케밥을 팔던 주방장은 가게 앞으로 나와 담배를 폈다. 그와중에 피자는 최악이었다.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해 웬만한 건 다 먹는 편이지만,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 결국 버렸다. 피자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로마는 참 알다가도 모를 동네였다.
6. 이탈리아 로마 (2)
'로마는 나랑 안 맞나 보다..'
하루종일 걷다, 트램을 타다 로마에 지쳐있을 때 숙소로 돌아갔다. 씻고 나오니 눈이 저절로 감졌지만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팠다. 배고픔에 호스텔 안에 있는 스낵 자판기 앞에 서성이자, 몸에 꽉 끼는 티를 입고 있던 남자 호스트가 허리를 유연하게 꺾으며 내게 말했다.
"여행 잘하고 왔니? 저녁은 먹었어?"
"아뇨, 스낵 자판기 쓰고싶어요"
"뭐라고?! 기다려봐! 내가 근사한 저녁을 만들어줄게!"
어리둥절할 만큼 과한 리액션이었지만 친절했다. 배고픈 내게 저녁을 만들어준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호스트는 신나게 프라이팬을 잡았다. 주방 의자에 앉아 열심히 요리를 하는 호스트를 구경했다. 혼자서 중얼중얼 어찌나 말이 많던지 힘들었던 내가 로마에서 처음 웃었던 날이다.
"내가 만든 파스타야. 정말 맛있을 거야. 맛있게 먹어."
“감사합니다”
바질 파스타와 뭔지 모를 파스타가 반반 섞인 그릇이 내 손으로 왔다. 남자 호스트는 코를 찡긋하며 떠났고. 나는 2인분 같은 1인분의 파스타를 앉은자리에서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나는 바질 파스타를 보면 아직도 그때 로마 호스텔에서 먹었던 파스타와 몸에 꽉 낀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 말 많던 호스트가 생각난다.
"내가 만든 파스타 정말 맛있지 않아? (찡그읏)"
참 배부르고, 참 친절하고, 로마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었던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