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은 서럽다》를 지은 김수업에 따르면 갓은 산이다. 산은 이제 토박이말처럼 쓰이고 있지만, 중국에서 들여온 한자말이다. 이것이 들어와서 토박이말 셋을 잡아먹었다. ‘뫼’와 ‘재’와 ‘갓’이 그것이다. ‘뫼’와 ‘재’와 ‘갓’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담고 쓰였으나, 이제는 ‘산’이라는 말에 그 뜻을 한꺼번에 담아 쓰게 되었다.
‘뫼’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높고 커다란 것(땅)을 뜻하는데, ‘재’와 ‘갓’을 싸잡는다. ‘재’는 마을 뒤를 둘러 감싸고 있는 뫼를 가리킨다. 성(城)의 우리말 풀이가 ‘재’인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갓’은 집을 짓거나 연장을 만들거나 보를 막을 적에 쓰려고 일부러 나무를 가꾸는 뫼를 뜻한다. 그런데 머리에 쓰는 갓은 본래는 ‘갇’이었으나 갓으로 소리가 변하게 되었다. 하여 산을 가리키는 ‘갓’과 헷갈릴까봐 ‘멧갓(묏갓)’이란 말을 따로 만들어 썼다. 또 보를 짓는 데 쓸 나무를 키우는 뫼를 특별히 ‘보갓’이라 하였고, 이러한 나무를 지키는 이를 ‘갓지기’라고 불렀다. 이처럼 ‘갓’은 지금의 ‘산’을 가리키면서도 더욱 섬세한 뜻으로 쓰였다.
《조선상고사》를 주해한 김종성에 따르면, 고어에서 산림은 ‘갓’ 혹은 ‘가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대에는 지금의 함경도, 길림성 동북부, 연해주 남부에 수목이 울창하여 수천 리를 가도 끝없는 삼림의 바다가 이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가시라’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가시라를 이두로 표현하여 갈사국, 가슬라, 가서라, 하서량 등으로 적었고,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아슬라주(阿瑟羅州), 하서국(河西國)이라고 하였으며,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쓴 《삼국사》에서는 가섭원이라 표현하였다. 이 가시라를 중국 역사서들은 대개 옥저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가시라라는 말을 예족(濊族)이 ‘와지’라고 발음하던 것을 중국식으로 발음하여 옥저라고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 역사서에서 전하는 갈사국, 가슬라, 가서라, 하서량, 가섭원, 옥저 등은 모두 ‘가시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부루가 흉노 모돈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아란불과 힘을 합쳐 갈사나(지금의 훈춘 일대)로 옮겨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동부여라고 이름하였는데, 이 나라가 곧 가시라다. 갈사나와 가시라는 표기만 다를 뿐 뜻이 같다. 이후 3대 대소왕 대에 와서 고구려 대주류왕에게 크게 패하여 대소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동생들(모갑과 모을)이 각각 북동부여와 남동부여를 경영하게 되었는데, 북갈사(북옥저)와 남갈사(남옥저)라고 불렀다. 그러니 갈사, 가슬, 가섭의 이두 독법을 분석해 보면, 모두 ‘가시’ 혹은 ‘가시라’임을 알 수 있다.
‘가시라’는 먼저 ‘가시+라’로 분석된다. 이 분석에 따르면 ‘가시’가 곧 ‘산림’이란 뜻이 된다. 하지만 ‘가시’는 본래 ‘갓’이던 것이 다음절화되면서 만들어진 이형동의어로 보인다. ‘엄’, ‘압이던 말이 ‘어미’, ‘아비’로 변천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따라서 ‘갓’이나 ‘가시’는 모두 산, 숲, 산림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라’는 ‘땅’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라’는 때로 ‘수도’라는 뜻으로도 쓰고, ‘나라’라는 뜻으로도 쓴 듯하다.
그런데 ‘가시라’의 이두 표현이 가서라, 가슬라, 하서량, 하슬라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갓’의 음절을 늘려주는 모음이 다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으’와 ‘어’, 때로는 ‘의’가 넘나들고 있음이 발견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가시’보다는 ‘갓’이 확실히 더 고어형임을 알겠다.
요컨대 ‘갓’은 ‘산림(山林)’의 뜻을 담고 있었고, 하서량(河西良)은 ‘산림의 땅’, ‘산림의 나라’를 가리키는 말의 이두 표기이다. ‘갓’은 수풀이 우거진 산림이나 특정한 목적으로 나무를 키우는 임산(林山)이다. 이 말이 남도의 지방에 지금까지 토박이말로 버젓이 살아 있으니, ‘갓’이라는 말의 나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