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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y 06. 2021

본능과 자아의 변주곡

- 최은애의 수필 '상사바위'를 읽고 3-2 <내가 읽은 책과 세상>

3. 전설과 수필 2


후반부 열여덟 개의 문장은 전설의 그림자 주변을 서성거린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문단들은 전설이라는 우물에서 기어 나왔을 것이다. 태고적 물비린내를 온몸으로 풍기며 전설의 우물 주변을 맴돈다. 끝내는 글쓴이의 내면으로 되끌려와 평범한 수필다움으로 회귀한다. 글쓴이의 이드는 드디어 슈퍼에고의 파수와 견제를 받으면서 가라앉는다. 반사회적, 반규범적인 분출은 전설로부터 동일시된 데에서 비롯되었다가 사랑의 ‘무모함’에 주목하면서 이질화되어 왔다. 글쓴이는 어쩌면 하인 남자의 몽매하여 실현 못한 사랑의 비극에 이끌려 전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여자의 처절한 소통 불능에 직면함으로써 현실 규범에 체포된다. 거기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삶의 꽃, 사랑은 마음을 주고받는 가운데에서 피는 것임에 눈 뜬 것이다. 그러나 이 소통의 아름다움은 초자아와 무의식이 가장 완벽하게 조화할 때 꽃 피는 법이다. 이 글이 다다른 종착역 역시 소통하지 못하는 슬픔에 흠뻑 젖어 있지 않은가.


“내가 찾은 남해 금산은 온통 기암괴석으로 덮여있었다.”라는 문장은 전설을 만나기 전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서른한 번째에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객관적인 시간을 고려할 때, 맞지 않을뿐더러 수필적 구성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순서가 마음에 든다. 원시적 전설을 처음 만난 글쓴이의 감동이 어떠했는지를 단번에 눈치 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배치함으로써 전설을 들은 사람이나 상사바위를 본 사람보다 먼저 전설 속의 등장인물이 독자를 맞이하게 된다. 남자의 비극성과 여자의 극복성, 그리고 이들이 엮어낸 의사소통의 단절이라는 비극이 글쓴이의 감상 위로 부상하는 효과가 매우 커진 것이다. 수필이 ‘자아의 세계화’ 갈래라는 조동일의 정의에 다소 위배되더라도, 오히려 나는 그 위배됨에 매혹된다. 말하자면 ‘상사바위’는 일상생활의 소재(전설)의 내부로 틈입하여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나와서는 혼자 토로하는 말법이다. 소재의 주변을 맴돈다기보다 소재에 파묻힌 채로 헤엄치고 놀다 오는 식의 말법이다.


‘상사바위’라는 수필은 나의 상사병을 들쑤시면서, 지금껏 묻어 두었던 가장 솔직한 이드를 손잡아 끌어올려 준다. 그러한 이드는 나의 에고로 감내하기 어려워서 밀쳐놓았던 삶의 어떤 부면들이다. 나의 이드와 에고는 비로소 협주를 시작한 셈이다. 이렇게 무모해짐으로써 나의 에고는 더욱 든든해지고 이드는 더욱 솔직해질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나의 이드, 그녀는 서울에 있어도 좋고 남해 금산 상사바위 위에 앉아 있어도 좋다. 우리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가능성의 확신이 아닌 우리의 의지를 전제해서 한 말이다. 가장 원초적인 그녀는 가장 문명적인 서울에 살아도 좋다. 가장 의식적인 나는 가장 시원적인 남해 금산에 있어도 좋다. 다만 남해 금산, 상사바위의 전설만은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영원하기를 …….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남해금산/이성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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