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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y 05. 2021

본능과 자아의 변주곡

- 최은애의 수필 '상사바위'를 읽고 3-1 <내가 읽은 책과 세상>

3. 전설과 수필 1


‘전설’은 수필을 쓴 사람의 문체 속에 용해되어 매우 주관적으로 전달된다. 글쓴이의 문체는 글쓴이의 감상을 담은 찻잔이다. 중간 중간 전설을 들은 글쓴이감상과 해석, 그리고 때때로 불거지는 의아스러움 들이 한데 섞여 있어서 서사도 아니요 수필도 아닌, 전설과 수필이 혼재된 요상한 갈래글이 탄생한다. 이 느낌은 여인에게서 뱀을 어내듯 전설을 따로 분리하는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수필이 시적 형태를 지닌 듯하다는 느낌은 원시종합예술을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글쓴이가 어떤 모종의 문학적 실험을 도모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 점은 확실히 글쓴이가 글 쓰는 사람다운 모험심과 반이론을 지녔음을 믿도록 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자아는 물론 본능 쪽에도 한 쪽 발을 담가 둔 채 글에만 매몰된 진짜  냄새가 난다. 문학의 상징성과 꿈의 상징성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꿈은 의식세계에서 억압된 일체의 욕구들이 의식이 잠든 시간을 이용하여 활개를 친다. 그러나 순전히 본능만의 세계는 아니어서 의식 세계의 찌꺼기들과 얽히고설켜 매우 혼란되고 상징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문학은 나타나는 형태가 꿈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합리적이어서 변환되고 상징화되는 정도가 더 심해진다. 어쨌든 꿈이나 문학은 무의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무의식이라는 심리는 반사회적인 경우가 많아서 현실의 질서 일체를 거부하고 반항한다. 문학 창작이 플라톤의 말대로 접신(接神), 즉 영감으로부터 시작된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영감의 본질을 혼란과 무질서, 소나기로 응결되어 떨어질 관념의 구름이라고 정의하는 데에 동의한다면, 확실히 작가의 창조력은 의식이 근본이 아니라 무의식이 근본이다. 이런 점에서 글쓴이는 천재성을 지닌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쩌면 그녀는 의식 쪽에 가까운 수필보다는 무의식 쪽에 가까운 시나 소설에 더 뛰어날 것 같기도 하다.


전설은 수필이라는 갈래의 호위를 받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이 둘은 마치 연애하는 연인들처럼 서로 내밀한 속삭임으로 서로 껴안고 있고, 전설 속의 뱀과 여자처럼 물 샐 틈 없이 얽혀 있다. 이 점은 첫째 문단부터 넷째 문단까지 주도면밀하다. 수필은 객관적인 거리를 지탱해 내지 못하고 전설이라는 까마득한 원초적 심리 기제 속으로 잠행하고 있다. 서로 다른 구슬들이 한 보자기 속에서 섞이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질의 액체가 서로 삼투하는 양상이다. 전설과 수필은 서로 어루만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로 등을 보이며 밀어내기도 하는 짜임새인 것인데 전설 속의 뱀과 여자의 운명인 양 여겨진다. 우리는 늘 불가능에 관한 한 도전 의식과 반항심을 키워왔다. 전설 속의 남자가 뱀일 수밖에 없었던 팔자로 남고, 여자는 또다시 현실의 자아로 복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듯이, 전설과 수필 또한 의사소통할 수 없을뿐더러 끝내 서로가 화합될 수 없는가. 전설은 너무도 아득한 이드의 골짜기를 기어올라온 듯이 혼미하고 어지럽다. 우리의 합리와 논리에 반역하는 본능 덩어리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수필이란 얼마나 삶에 적합하고 친절한 갈래인 것인가? 이 둘의 결혼은 불법이고 불륜인가. 수필도 아닌 것이 전설도 아니고, 그러면서 수필이나 전설의 이름을 무색하게 하는, 이냥 촉촉한 글 한 편으로 만족하고 말 수는 없는가. 최은애의 ‘상사바위’는 문학의 갈래를 이미 초월하면서 문학 본연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 원초적이고도 쾌락적인 유희 본능을 아무런 문학적 기교를 의식하지 않고 즐길 수 있음에 나는 매혹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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