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과 자아의 변주곡
- 최은애의 수필 '상사바위'를 읽고 2-3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 상사와 사랑 3
남자와 여자를 독립된 두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한 사람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의 심리나 상징을 한 인간의 본능이나 관능, 쾌락 혹은 원초적 무의식으로 간주하고, 여자는 한 인간에게 감춰진 심리 중에 자아나 이성, 현실성 혹은 교육된 의식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하인인 남자는 상사(집착)가 달라붙자 어둠을 틈타 본능적으로 뱀처럼 여체를 감는다. 여자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찼음을 알고 산의 높음과 밝음 속에서 몸을 풀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다. 여자는 남자가 달라붙자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무당의 주선으로 밝고 높은 산에 올라 굿을 함으로써 죽을 고비에서 뱀(남자에게서 입은 마음의 상처)을 떨쳐 내고 되살아난다.
남자와 여자를 한 사람의 내면 심리로 보는 경우엔 이 전설이 본능적인 유혹에 넘어갈 뻔하다가 혹은 넘어갔다가 다시 자아(이성)를 회복하여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전설은 ‘상사바위’라는 객관화된 사물에 얽혀 전해 오면서, 남해금산 주변의 사람들에게 불가항력인 비극을 어떻게 이겨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었는지 모른다. 욕망과 금기라는 양 극단 사이로 난 아슬아슬한 삶의 길에서 목숨과도 같은 균형을 잡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치 앞이 천국이고 한치 뒤가 지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구조화해 놓은 상징성이 대단히 높은 문학이 된다.
줄거리에는 많은 빈틈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여자가 무당과 함께 산에 오를 때 남자의 존재 양상이다. [줄거리1]에서는 ‘뱀이 여자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일 가능성이 크므로 여자의 몸에 감긴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파충류로서의 뱀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뱀의 존재 양상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말할 것도 없이 어느 날 나타난 노인에게 있지만 전설에 드러난 노인의 말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길이 없다. 너무도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추해 볼 수밖에 없겠는데, 그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여자(혹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 남자를 동행했다고 볼 수 있다. 남자에게 이 주인 여자가 시키는 일이라 거절할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마음 한 구석에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따라 나서게 되는 경우이다. 혹은 여자가 차마 그 남자의 얼굴도 보기 싫었으므로 여자는 그녀의 어머니와 산에 오르고, 무당이 남자를 데리고 여자가 오른 다른 길로 산을 올랐을 수도 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남자는 소문 속에서도 이미 정체가 밝혀져 있었거나 혹은 무당이 점을 쳐서 남자를 찾아내었을 것이다. 결국 남자의 존재가 여자와 나란히 산 절벽에 앉는 것이라면 위의 [줄거리1]은 다음에 기술된 [줄거리2]처럼 바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임에 틀림 없다.
[줄거리2]
1) 하인 남자가 주인집 딸을 사랑하여 상사병을 얻는다.
2) 어느 날 밤, 남자는 여자의 방에서 여자를 범하게 되고, 여자는 충격을 받는다.
3) 이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자 여자의 정신적 충격은 심해진다.
4) 어떤 노인의 말대로 여자(혹은 그녀의 어머니)는 하인과 무당을 데리고 산 절벽 위에서 굿을 연다.
5) 굿이 무르익자, 남자는 사랑을 단념하고 절벽 아래로 투신한다.
둘째는 여자가 남자를 통하여 동행하지 못했을 경우이다. 남자가 누구였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캄캄한 어둠 속이었고, 경황이 없던 터라 여자는 남자의 정체를 몰랐을 수도 있다. 다만 여자의 표정이나 행동거리를 통하여 마을 여인네들이 짐작한 것이 소문이 되었을 수도 있고, 남자가 비천한 신분인 터에 만취한 상태이거나, 혹은 영원히 자기 여인으로 만들려는 은밀한 속셈으로 자기를 숨기면서 여자의 행각을 소문내었는지도 모른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면 여자는 남자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노인이나 무당마저도 이미 저질러진 그까짓 것은 알아서 뭐하겠느냐며 훗일이나 대비하자는 차로 여자의 몸에 묻은 더러운 체흔과 진저리 처지는 마음의 상흔을 털어내는 방책을 일러 주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남자는 마을에 남아 있으면서 소문을 듣게 되고 굿하러 집을 나서는 여자를 보고 스스로 마을을 떠났을 수도 있고, 혹은 일을 저지른 그날 밤에 어딘가로 내빼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남자가 여자 곁에 없다고 보는 경우, 여자의 몸에 감긴 뱀은 진짜 남자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남긴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거나 그 충격으로 인한 상흔을 상징화해 놓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굿이라는 것이 진정 귀를 물리치기보다는 굿을 맡긴 사람 자신을 괴롭힌다고 믿는 귀를 굿으로 내쫓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정신 치료적 풍습이라는 전제하에서는 이 두 번째 해석은 그럴 듯하다고 본다. 빈틈 메우기가 남자의 부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면 [줄거리1]은 다시 [줄거리3]으로 고쳐 정리해 볼 수 있다.
[줄거리3]
1) 하인 남자가 주인집 딸을 사랑하여 상사병을 얻는다.
2) 어느 날 밤, 남자가 여자를 범하여, 여자가 충격을 받는다.
3) 이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자 여자의 정신적 충격은 심해진다.
4) 굿이 무르익자, 여자는 충격이 해소되고 옷을 여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