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과 자아의 변주곡
- 최은애의 수필 '상사바위'를 읽고 2-2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 상사와 사랑 2
‘상사바위’는 일곱 개의 문단과 쉰아홉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수필이다. 전설의 줄거리를 간추려 보면 크게 다섯 도막으로 갈무릴 수 있다.
[줄거리1]
1) 천한 하인 처지에 놓인 남자는 주인집 무남독녀를 안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가슴앓이 끝에 병을 얻는다.
2) 어느 날 밤, 뱀 한 마리가 여자가 잠든 방으로 기어들어, 여자를 안은 뒤 떨어질 줄 몰랐다.
3) 흉흉한 소문은 문지방을 넘고 뜰을 지나 담을 넘어 온 마을에 퍼졌다.
4) 어느 날 나타난 노인의 말을 따라 온몸에 뱀을 감은 채, 여자는 무당을 앞세워 산 절벽 끝에 올라앉았다.
5) 굿이 무르익자 뱀은 몸을 풀어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여자는 옷을 감싸 가슴을 덮고 치마폭을 추슬렀다.
전설 속에는 주인공이 둘이다. 남자와 여자 중에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모티브를 중요시한다면 당연히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이 전설은 비극이다. 이 이야기를 전설이라는 상위 명칭에 연연하다면 역시 이야기는 비극이다. 대개 우리나라의 전설은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종말에 감동적 가치를 두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이야기를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건강한 사회인으로 복귀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거기서는 분명 극심한 고통도 이겨내는 한국 여성의 강건한 생활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간 배경이 남해라는 점, 즉 논밭이 드물어 늘 먹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섬이라는 지역적 역경을 고려한다면 남해인의 특성을 떠올릴 것이고, 해신에게 남편을 빼앗긴 채 홀로 자식들을 길러내야 했던 섬 여인네의 억센 생활력을 교훈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서 남자와 여자는 두 사람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우선 남자와 여자를 각각 독립된 인격체로 보고, 남녀 사이에 벌어진 염문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 속에 내재된 대립된 요소들을 꼬집어 보자면 이러하다.
[줄거리1]에서 보다시피 남자는 남자이면서 뱀이다. 남자 스스로 생각하기엔 틀림없는 사람이지만 여자의 입장에서는 뱀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신분이 하인인 처지에 있는 남자로부터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공격을 받은 여자가 남자를 인격체로 대할 리는 만무하다. 물론 [줄거리1]에서 전설 속에서까지도 남자를 뱀으로 묘사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자를 안았을 때, 그는 남자가 아닌 뱀이어도 좋았다.…남자는 물론 가능에 대한 사랑으로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은 이미 스스로 뱀이 됨으로써 끝나 버린 건 아닐까.”[둘째 문단]
밑금 그은 부분을 언뜻 보면 다소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좋았다’나 ‘끝나 버린 건 아닐까’라는 부분에서 남자가 뱀으로 표현된 것은 전설 속의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즉 이 점은 수필가가 남자의 사랑 행각에 찬성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일종의 비평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들이 전설과 수필을 꽁꽁 묶어 매어 이 글이 수필인지 꽁트인지 판가름이 되지 않는다는 평을 받도록 한 부분이다.
심리학에서나 꿈의 해석에서 뱀은 남근을 상징한다. 남자가 뱀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남자의 성적 욕구를 과장되게 표현한 상징이다. 남자가 진실한 정신적 사랑이 아닌 오로지 성적 해소 차원의 욕망, 갈급한 욕망에 못 이겨 여자를 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 폄하적 판단의 결과인 것이다. 남자의 사랑도 ‘이도령’이나 ‘로미오’가 지닌 사랑을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설 속의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는 지점에서 비롯된 남자의 또 다른 별명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수필가가 첫 문장에서 ‘남자의 사랑은 무모했다.’고 했지만 정작 남자의 사랑은 무모했던 것이 아니라 모호했던 것이다. 이 ‘무모함’과 ‘모호함’은 전설을 읽는 우리의 자아가 판단해 내는 것이다. 전설 속의 남자 입장에 서면 ‘모호함’은 남을지라도 ‘무모함’은 사라진다. 왜 그러냐 하면, 전설 속의 남자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 있고, 지극히 자아의 판단이 흐려져 있으므로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하인이라는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라면 정녕코 육체적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의 심리 상태가 이러한 지경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확실히 남자는 남자이기 이전에 오로지 수컷이었을 뿐이고, 이러한 해석이 전제된 다음에야 기어이 남성으로서의 하인은 남근으로 상징되는 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뱀은 또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잠행했다. 어두웠기에 용감했고 그의 욕망을 해소했다. 어둠은 이드의 골짜기에서 몰려왔다. 어둠의 상징은 죽음이고 실패이고 비극이다. 낮은 곳(마을)에서 활발했던 뱀의 움직임은 높은 곳(산의 절벽)으로 오르면서 힘을 쓰지 못한다. 서사적 플롯에 따르면 여체에 만족하느라고 그랬겠지만 높은 곳은 초아자의 공간으로 해석해 볼 수 있으므로 산에서 뱀이 꼼짝하지 않다가 기어이 맥이 빠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는 이야기의 흐름은 그럴듯하다. 산 위에서의 시간이 낮이었으므로 이 추리는 더욱 믿음직하다. 한편 ‘감다’와 ‘풀다(풀리다)’, 그리고 ‘집착’과 ‘단념’ 또한 대립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어둡고 낮은 곳에서 집착하여 감았고, 밝고 높은 곳에서 단념하여 풀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뱀일 수 있으며 동시에 완벽하게 남자 자신의 이드에 지배당한 상태의 상사병 환자인 것이다.
남자의 사랑은 여자에게 관능으로서 전해졌으므로 실패했다. 절망하였으므로 뱀은 낭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남자 이야기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은 관능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현상 그대로의 상사였다. 이드의 지배하에서 내린 판단은 이 세상의 모든 현실 앞에서는 오답이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배타되었고 심지어는 이 현실의 사랑이라는 범주에서 영원히 추방당했다. 나는 그 뱀의 자살이 자살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이 타고난 에고의 그물에 걸려 질식한 것으로 보고 싶다. 남자는 이드의 마수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에고의 구출 혜택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원시적 동물성은 에고의 논리구조나 슈퍼에고의 당위성에 쫓겨나고 만 셈이다.
남자에 비해 여자는 에고가 강한 사람이다. 시간과 공간이 남자와는 구조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본능적인 공격을 당하였을 때, 여자는 티끌만큼도 뱀을 배려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그러면 못쓴다는 에고의 지속적인 최면 마술 같은 것에 걸려 있던 사람으로 읽힌다. 그것이 유교적 금기이든 종교적 계율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이 점은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자,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회인으로서는 매우 건전한 인물이다. 끝끝내 진저리 쳐지는 뱀을 몸에서 떼어 내고 남해 금산 바다 앞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가를 증명한다. 이런 여자는 열녀라기보다는 강한 여자이다. 심봉사의 여인으로 치면 곽씨부인형보다는 안씨맹인형이랄까. 삶의 의욕이 너무도 강렬하여서, 죽어 열녀가 되기보다는 살아 어미가 되고 딸이 되는 에고형 인간인 것이다.
여자는 느닷없는 본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수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그 나락에서 사랑을 요구하였지만 여자에게 그건 일종의 교미에 지나지 않았다. 죄의식과 더불어 한 마리의 파충류는 되기 싫다는 몸부림을 치다가 구원자를 만난 것이다. 구원자는 전설 속의 어떤 노인이다. 노인은 인간 심리상 초자아로 풀이된다. 차후 여자는 무당의 도움을 얻게 되는데 무당은 문제를 해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하고 있으니, 해석하자면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균형자인 자아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