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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y 01. 2021

본능과 자아의 변주곡

- 최은애의 수필 '상사바위'를 읽고 2-1 <내가 읽은 책과 세상>

2. 상사와 사랑 1

2. . 사와 사랑 1 상사와 사랑 1

'상사'는 서로 상과 생각 사를 쓴다.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을 지닌 말이지만, '상사'에서 서로라는 말은 참으로 부질없다. 예부터 이제까지 '서로' 마주 상사에 걸려 든 사람들이 한쌍이라도 있었던가? 그랬다면 상사에는 불행이라는 얼룩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니 상사란 낱말 가운데에 '상'은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리고, 그 묘한 콧소리만 애절하게 남아 말가락을 맞추어 줄 뿐이다. 그야말로 '상사'는 그리움이라 쓰고 짝사랑이라 읽어야 하는 진실된 모순을 포태하고 있다. 대개 상사는 고질병으로 현신하여 그리워하는 당사자를 말려 죽여 왔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무엇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킨다. 사랑이라는 말도 애초엔 생각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를 몹시 생각하거나 어떤 이가 자꾸 생각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있는 증표가 아닐까. 사랑이라는 옛말은 생각이라는 요즘말에 대응하지만, 요즘이라 한들 생각이라는 말이 사랑이라는 속뜻을 낙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듯 생각과 사랑은 대물림되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상사'는 곧 생각이니, 상사도 생각이라는 말과 같은 혈족이다.  상사와 사랑은 우리들 마음 속에서 가시버시 함께할 수밖에 없는 연분의 동반자이다.


비극적 성향을 지닌 상사와 이상적 속성을 가진 사랑이 만나 이루는 완전한 일심동체, 현실의 아픔을 직시하는 상사와 이상의 행복을 동경하는 사랑은 둘이면서 하나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함께 나란하다. 이들은 마치 이드와 슈퍼에고가 내밀한 마음에서 함께 하듯, 이 수필의 대상인 전설과 주체인 수필이 공존하는 것과 닮아 있다.  ‘상사바위’라는 수필은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에서 비롯된다. 씨앗과 과육이 한 몸을 이루듯 수필과 전설은 보다 완전한 말꽃을 피우기 위해 씨실과 날실을 교차해 나간다. 수필 속에 들어 앉아 있는 전설의 처절한 아름다움은 쉰아홉 개의 씨날실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짜내려간 공력의 열매다. 수필 장인의 솜씨라 할 만하다.


수필 '상사바위' 전문을 소개한다.


남자의 사랑은 무모했다. 감히 넘겨다 볼 수 없는 무남독녀 주인의 딸이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대문안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이야 가능한 일이었으나 남자의 사랑은 고통스러웠다. 여자를 안고 싶었다. 그 절실함이 그대로 사랑인지, 아니면 단순한 본능의 탐닉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를 안음으로 자신의 지향을 완성시키고 싶었다. 자신이 놓여 있는 천한 하인의 처지를 어쩌지 못했기에 더욱더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로부터 너무 멀리 있었다. 아, 다스려야 할 욕정. 목마른 몽상 속. 견딜 수 없는 가슴앓이 끝에 남자는 병을 얻었다. 숨이 끓어질 고통 끝에 남자는 병을 얻었다. 숨이 끊어질 고통 끝에 마침내 죽음. 그러나 여자를 안고 싶은 바람마저 포기할 수 없었다. 그 갈급한 욕망 앞에 삶과 죽음의 구획조차 무의미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여자가 잠든 방으로 뱀 한 마리가 기어들었다. 뱀은 허겁지겁 잠든 여자의 몸을 칭칭 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자를 안았을 때, 그는 남자가 아닌 뱀이어도 좋았다. 그러나 뱀이 여자를 안았을 때 이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불가능이었다. 사랑의 불가능의 몸짓도 사랑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남자는 물론 가능에 대한 사랑으로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은 이미 스스로 뱀이 됨으로써 끝나버린 건 아닐까.


뱀은 여자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죄어 들뿐, 육신에 대한 집착으로 떨어질 줄 몰랐다. 흉흉한 소문은 문지방을 넘고 뜰을 지나 담을 넘어 온 마을에 퍼졌다. 어느 날 나타난 노인의 말을 따라 여자는 무당을 앞세워 산을 올랐다. 온몸에 뱀을 칭칭 감은 여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올라앉았다. 아름답고 푸른 바다는 아득한 남쪽으로 펼쳐져 있고 섬은 다투어 여자의 치마폭으로 달려들었다. 바다를 받아 안으며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사랑은 싫어 나를 놓아줘. 사랑과 미움이 삼투하는 순간. 무당의 주술을 들으며 남자는 생각했다. 의사소통의 불가능.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인간과 파충류가 서로가 서로에게 심어 놓은 운명의 무늬.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원천적인 운명. 소통 불가능한 사랑의 몸짓을 단념해야 하리라. 덩더쿵 덩더쿵 굿이 한창 무르익어 여자가 이 관능의 사랑에 진저리를 치자 뱀은 꿈틀 몸을 뒤채다가 스르르 제 몸을 풀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아, 상사 바위. 끝 모를 목숨의 낭떠러지. 그리움과 사랑을 통과해서 그러나 마침내 막막한 이별.


남자는 절망으로 추락했을까. 남자를 정말로 괴롭혔던 것은 한 여자를 향한 열정에 대한 갈등과 죄의식이었을까. 집착이다. 무모한 집착이다. 뱀의 무게가, 남자의 무게가 여자의 몸에서 빠져나가자 여자는 흩어진 옷을 감싸 헤벌어진 가슴을 덮고 치마폭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뱀의 허물을 쓰고 바닷가에 나뒹구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여자는 쓸쓸한 자유를 느꼈을까.


내가 찾은 남해 금산은 온통 기암괴석으로 덮여있었다. 갖가지 형상으로 일어서거나 앉거나 드러누운 거대한 돌덩이들은 삶의 절대적인 불가능을 전설로만 간직한 채 수억 년 오랜 세월을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하늘을 우러르거나, 보답 받지 못할 고통으로 무릎 꿇거나, 어긋나 버린 삶에 지쳐 쓰러져 있었다. 먼 바다는 남쪽으로 끝도 없이 열려 있고 섬들은 바다를 묵묵히 견디고 있는데 바위들은 그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나도 그대로 바위가 되어 산꼭대기에 섰다. 그때 보았다. 과거의 어두운 전설로부터 부활하여 현재로 걸어오는 두 사람을. 남자는 이제 뱀의 허물을 벗고 바닷가를 걸어 나오고 여자는 여전히 절벽 위에 서서 치마폭을 움켜쥔 채 바람을 맞고 있다. 무모한 사랑으로 몸을 던져 버린 한 남자.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던 한 여자. 그들의 전설로부터 고통뿐이었던 사랑, 가슴 저미는 그리움, 막막한 이별을 본다.


사랑을 이룬다는 속된 말에 의지하여 인간이 희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위의 참혹한 견고함을 닮은 운명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실함 때문에 금산 꼭대기에 선 나의 가슴이 서늘하다. 그러나 오늘도 어디선가 이런 사랑들이 여전히 다시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금산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휘적휘적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로 소통되지 않은 비극이 서러워서 나는 속으로 울었다. 막 일몰이 시작되었고 가을 또한 속수무책으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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