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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21. 2021

노모를 찾아서

- 어머니 아흔세 돌 생일날에 <사로잡힌 생각들>

지난 주일 식구들이랑 어머니에게 다녀왔다. 어느새 딸은 어른이 되어 버렸다. 갓배운 솜씨로 뱀또아리처럼 휘감아 놓은 물미길(물건-미조간 해안지방도) 아홉등 아홉구비를 다림질하듯이 차를 몬다. 딸은 맏이로 태어나 두 남동생을 거느렸다. 성품이 여간 씩씩하지 않아 늘 믿음직스럽다. 멀리 마안도를 내다보며 나는 시험 공부에 붙잡힌 를 떠올렸다. 집에 혼자 두고 온 것이 꼭 물가에 두고 온 애 같다. 나도 이제 낫살을 먹은 탓인지 그 애를 대할 적마다 마음이 무겁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용쓰는 모습이 더 안타깝기 때문이다. 입시제도는 두억시니인 양 버겁다. 둘째는 뒷자리에서 줄기차게 존다. 올해 학회장을 맡고나서부터는 밤낮으로 뛰어다니다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기가 일쑤다. 마음이 너그러워서 그런지 늘 주변에 사람이 많다 싶더니 기어이 학회장을 떠맡게 된 모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틀림없이 사람좋아 보이는 탓에 떠밀리어 맡게 되었을 터이다.  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산다는 것이 본시 이렇듯 바쁘고 힘겨운 일이었나 싶어진다. 아이 셋을 키울 적 장면들이 바다풍경을 배경으로 낡은 영화필름처럼 지나간다.


산다는 건  조금은 버거우면서도 서러운 일인가 싶다. 특히나 나를 서럽게 하는 것은 고향집을 지키며 서 계시는 어머니 풍경이다. 어머니는 늘 아들자식과 그 식솔들을 떠나보낼 때 살팎까지 나와 그 크고 거친 손을 흔들어 주신다. 왜 하필 그 쓸쓸한 낯빛과 흔들리는 눈동자만 가슴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덩그렇게 남겨진 텅 빈 집 안의 어둑함과 헛헛함, 그 아릿한 외로움의 볼모가 된 마음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때로는 식구들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올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가. 그러나 나 혼자 떠날 때는 또 어찌할 것인가.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다. 어머니에게 다녀오면 이젠 내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더욱 씩씩해지는 건 아내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날이 갈수록 속죄라도 했듯이 어머니의 아린 상처에 눈을 감는다. 그렇게 누구나 무정한 자식이 되어가는 것인가. 자식은 부모에게 늘 죄인일 수밖에 없다.


삶은 때론 저녁 붉새처럼 서럽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이 언술의 방점은 서러움에서 아름다움 쪽으로 토끼뜀을 한다. 내 어머니의 이맛살 주름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룩진 빗돌처럼, 해도해도 더 짓누르는 막둥이의 학교 공부와 둘째의 고달픈 학회일과 맏이의 임용시험처럼 무겁고 힘겹고 숨차다. 그래서 아프고 서럽다. 하지만 어머니의 오랜 기다림이나 내 자식들의 버티고 견딤은 나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것은 자기버림의 거룩함이다. 사슴이 잡아 먹히는 건 사자보다 나약해서가 아니라 사자를 먹여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안다. 또 나는 한번 더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 내 어머니가 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하는 사랑,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마음이 나에게도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미사가 끝나고 고요해진 성당에 앉아 있으면 어떤 것이 값지고 멋진 삶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담장을 넘어온 능소화 속에도 내 어머니, 내 아들의 모습이 있다.  서럽도록 아름다운 핏빛의 꽃잎 속에서 어릴 적에 보았던 서쪽 하늘의 붉새가 핀다. 어제 보았던 서러움은 오늘 누군가의 웃음소리로 환생하고, 오늘의 참고견딤은 하제를 사는 누군가를 노래하게 한다. 내 어머니는 내 아들의 과거요 공덕이다. 내 아들은 그 할머니의 꿈이요 빛이다. 지난 때와 오는 때는 무궁토록 이어져 있고 지는 쪽과 피는 쪽은 이렇게 짝으로 묶여있다. 삶의 서러움과 아름다움은 청실홍실 매듭지어져 있다. 이제 어머니에게 가고 싶다. 내가 더 서러워지기 전에 어머니의 아름다운 웃음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2018.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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