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민 Mar 21. 2021

거대한 여신의 치맛자락

- 나이이가라를 다녀와서 <사로잡힌 생각들>

난생 처음 본 나이아가라는 장쾌한 물줄기와  무시무시 굉음으로 나를 단번에 혼절시켜 버렸다. 폭풍치는 소리로 울부짖는 폭포수는 얼어붙은 캄차카를 지나, 깎아지른 로키를 넘어온 나그네의 섣부른 기대를 가차없이 부숴버린다. 하늘과 땅이 온통 물로 뒤덮인 노아의 홍수다. 어디까지가 땅이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도무지 알 길 없이 다만 천방지방 온갖 물들이 한바탕 뒤엉켜 흘러가는 물소리로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굼실대는 물길은 애오라지 지상 한가득 떼지어 밀려가면서, 일렁이고 솟구치고 출렁거렸고, 우우우 바람처럼 소리치며 내달리다 자빠지고 고꾸라지다가, 어딘가로 자꾸 미끄러져서 마침내 다다른 벼랑 끝에서 마구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도도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이 엄청난 풍광 앞에서 나는 천적의 포효 소리에 주눅 든 작은 짐승의 새끼처럼 낑낑거리면서, 억겁의 세월 위에서 신들의 잔치가 끝날 때까지 잘것없는 목숨의 숨통 뛰는 소리마저 감추어야 했다.


살아 날뛰는 천심 절벽의 비명소리는 장렬한 아파치 족장의 마지막 돌격 소리처럼 거칠고도 웅장하다. 너무도 두려워서 나는 오금도 펴지 못한 채 온몸을 떨어댔다. 거대 여신의 오줌발 같은 폭포수는 그 옛날 도깨비 천황이 몰아치던 신내린 탁록의 소떼들처럼 들이닥친다. 밑도 끝도 없이 부글거리며 끓어 넘치는 물보라 위로 숨 가쁜 물안개를 하루 종일 게워낸다. 그것은 마치 활화산이 뜨거운 양잿물을 토해내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었다. 나이아가라는 여신의 대한 음부를 드러낸 채 제멋대로 고매한 자세로 나자빠져 그녀만의 배뇨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아가라가 내어지르는 소리는 천둥소리다. 폭포수의 천둥 치는 소리는 여러 수천 년을  매일매일 폭발하며 장엄하게 흘러왔으리라. 팔백 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오지랖의 너비는 보잘것없는 높이 오십삼 미터를 일순간에 압도한다. 그렇게 일 초마다 칠천 톤의 물을 쏟아붓는 여신의 젖통은 만생군화의 목숨들을 먹이며 기르며 흘러 왔을 것이다. 리래왈라 여신의 전설은 여기가 땅 서낭님이 다스리는 광활한 소도임을 넌지시 말해준다. 이 장대한 물벼락을 맞이하는 동안 나는 지리산의 거인신 마고할미와 제주섬을 만든 신 설문대 할망을 생각하였다. 한쪽 발을 서귀포에 딛고 다른 한쪽 발을 부산포에 디딘 채 고기를 몰아 어부들을 도왔다는 설문대 할망은 한 겁에 몇 번쯤 여기 나이아가라 개천가소풍을 왔을까? 지리산 마고할미와 언니 아우 하면서 태평양을 개울처럼 놀았던 우리의 위대한 두 여신의 기품은 케이팝을 휘날리며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도 결코 꿀리지 않는다. 도리어 보무도 당당하다.


아주 오랜 옛날 하고도 더 먼 옛날 우리 조상에게는 알류샨과 베링의 바다가 곧 죽음이요 저승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섬들에는 아찔하게 어여쁜 여신들이 살면서, 지옥물을 건너는 사람들을 입김으로 음우해 주었으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여기에 이르러 신화처럼 목숨의 씨앗을 뿌리고, 씨앗은 자라 뿌리를 내렸으리라.* 프랑스 선교사 헤네핑이 이 거룩한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 고작 1678년이라고 하는데, 어쩌다가 이곳은 가장 야만적인 문명인들의 땅이 되어 버렸을까? 원주민들의 풍속과 유전자가 배달겨레와 가장 가깝다는 말이 나온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알고 보면 서부활극에서 야만인으로 죽어가던 미주 주민들이  이 땅의  임자가 아니던가.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한다. 내 피 속에 녹아 흐르는 도저한 유전자에 때문일까?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가고, 와서 살다가 죽고, 다시 와서는 되돌아갔건만 대도무문의 저 대모신다운 호연지기를 보라. 그럼에도 개미새끼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살가운 인자함을 보라. 한없는 이 너그러움을 보라. 자연을 거스르기를 밥 먹듯 하는 저 교만한 육식 종족들도 끝내 굴복시키지 못한 이 당당한 고함소리를 들어라. 영하 28도 폭포수 밑 지하 동굴 속에서 나는 홀로 마음이 흐뭇해지고 푸근해져 머리 위 나이아가라 쪽을 우러러 성호를 긋고 기도를 바쳤다. 그런 다음 땅 위로 올라와서 거대한 여신의 비단 치맛자락이 장대하게 너울대는 것을 바라보다가, 한동안 멀미가 울렁거려 기어이 속세의 더러운 구정물을 모두 게워내고야 말았다. 나는 한없이 크고 힘찬 대용천의 미륵님 앞에 엎드려, 오만방자하게 살았던 나를 돌이켜 묵상하고 여러 수백 번을 절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캐나다의 겨울 추위를 겨우 30분 버틴 나는 버스로 어서 돌아오라는 길잡이의 손짓을 보고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혹한의 헤살에 사로잡히기 전에 얼른 떠날 일이었다. 부랴부랴 리래왈라의 손을 놓고 돌아서 떠날 때도 거룩하고 아름다운 폭포는 우렁찬 우레 소리를 내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이 장쾌한 물살에 세상의 물욕 때를 씻어내고, 너도 한 번쯤 당당히 사는 시원함을 맛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등을 토닥여 주는 자비로운 수모신의 온화한 손길과 웅대한 목소리에서 무한 천혜의 사랑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살아생전 다시 안기고 싶은 여신님의 품안을 벗어나고 있었다.     


2017년 1월


* 손성태, 우리 민족의 대이동, 코리 

작가의 이전글 노모를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