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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21. 2021

상처 입은 영혼박물관

-김혜정의 소설집 '모나크나비' 추천사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아이의 등 너머로 이제 막 노을이 피려 하는데, 아이는 더 말을 잇지 못한다. 잠시 일어나 창문을 여니, 매복해 있던 만리향이 상담실 안으로 무진장 쏟아진다. 향기 참 좋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눈물을 훔친다. 몇 살에 가출했는지 모르는 엄마는 얼굴조차 기억에서 희미해졌고, 아빠는 새엄마를 들이면서 딸에게서 점점 멀어져갔다.


보름 전, 미술학원을 끊겠다는 일방적인 아빠의 일격에 고2 소녀의 꿈은 유리조각처럼 깨져버렸다. 아무리 빌고 사정해 봐도 돌아보지 않는 무정한 아빠의 고집. 저 대신 그림이 이제까지 딸애를 지켜왔음을 왜 모를까. 서러움의 언저리에서 아이의 상처가 덧나고 있음을 보았다.


바로 어제 상담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설 같은 실화요 거짓말 같은 현실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담하다 보면 알게 된다. 이다지도 깊은 상처를 안고서 어떻게 여기까지 견뎌 왔을까 하는 아이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새 우리 사회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픔을 둘러쓴 아이들로 가득 차버렸다. 학교서든 집에서든 학원에서든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상처투성이의 아이들을 본다. 공부하는 아이는 공부하는 아이대로, 노는 애들은 노는 애들대로, 청춘을 성적의 땔감으로 소진하거나 도둑고양이들처럼 배회하며 오늘도 사랑받지 못한 제 영혼을 낯선 길바닥에 내팽개친다. 관심 받지 못하고, 보호 받지 못하고, 치유 받지 못하는 까닭일 터이다.


김혜정의 소설집 ‘모나크 나비’는 단편 ‘영혼박물관’을 잇는 후속작인 셈이다. 이 ‘상처 입은 영혼 박물관’은 세상의 모서리나 칼날에 찔리고 벤 채 아파하는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들의 신음소리로 낭자하다. 감각을 넘어선 비명은 늘 영혼을 잠식하는 내상의 아픔에서 쏟아진다.


피안으로 가져갈 기억 하나 없는 가엾은 영혼 수애와 그녀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하고 망각의 세계에 남아야 하는 비운의 하율, 태어나 자신보다 쌍둥이 남동생인 나를 먼저 챙기는 것이 자신의 삶이어야 했던 은희와 나대신 죽은 누이에 대한 부채감으로 자괴감에 결박되어버린 나(찬희), 가난과 폭력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의 굴레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삶의 가치’를 놓지 않으려고 끝까지 맞버티는 나, 분노의 화신에게 볼모가 되어 영혼마저 빼앗겨버린 가슴 시린 신애, 멕시코의 시에라마드레산맥 숲속의 모나크 나비처럼 독기를 품으려다 스스로 중독된 순연한 영혼 지아, 말할 줄 아는 소라게로 분열된 내면적 자아와 치열하게 갈등하며 구원의 문을 열고자 몸부림치는 나.


이밖에도 여섯 편의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상처 입은 영혼들로 가득하다. 이나저나 면도날 같은 세상길을 상처 하나 없이 걷는 아이가 어디에 있으랴. 다만 그 아픔에 공감하고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곧 우리 어른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주머니’가 끓인 물의 윤슬이 백만 송이 과꽃으로 피어나 반짝거리며 그 어둡고 추운 해저에 가 닿기를 바라듯이, 어른에게는 어른의 몫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뱀파이어 울쌤’은 영혼의 검은 옷자락을 끌며 짙은 화장 속에 열상의 흔적을 감추고, 차가운 말투로 세상을 밀어내는 아픈 영혼이지만, 다육들과 길고양이들과 신애와 같이 상처 입은 어린 영혼들 앞에서는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해지는 어른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녀와 동족의 뱀파이어일지 모른다.


  김혜정의 소설은 늘 여리고 아픈 사람의 상처에 주목해 왔다. 상처를 입힌 자를 미워하기에 앞서 상처 입은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일에 언제나 혼신의 힘을 다 한다. 이러한 작가 정신 때문에 그녀의 모든 서사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깊숙이 스미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떠한 갈등도 화해와 긍정의 힘으로 풀어낼 줄 아는 작가만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의 ‘깨진 관계 박물관’은 깨진 사랑의 상처를 위로해 주는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김혜정의 소설집 ‘모나크 나비’가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이 입은 내면적 상처를 치유하고, 이에 대한 전 사회적인 희망과 치유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영혼치유박물관’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면 가장 먼저 나의 내담학생 그림소녀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성품이 넉넉하고 푸근한 현실 속 작가를 소개하는 마음으로.     



2020.10.1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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