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1737-1805)과 그의 문학에 관하여서는 지금껏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다. 그 결과 대부분 연구들은 긍정적 평가에 안주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인본주의나 민족주의 등을 들기도 하고, 독창성과 자주성, 풍자성과 골계성 등을 쳐 주기도 하면서 그의 문학 세계를 보려 하거나 혹은 시대의 선구자, 반봉건적 사상가 등으로 일컬으면서 그의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 사실은 연암 자신이나 그가 남긴 많은 문학 작품들은 충분히 칭찬 받을 만하며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자리 매김을 하면서 우뚝하다. 그는 당대 현실을 좀 먹는 자들이 자신과 같은 양반들이며, 바로 그들이 자신의 신분을 잊고 자신의 할 바를 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가난하고 나라 힘이 약해진 것으로 보았다. 그는 여느 다른 양반들과 함께 대의명분이라는 허세에 안주한, 양반답지 못한 양반, 사대부답지 못한 사대부들을 매섭게 질타하면서, 스스로는 문장을 개혁하는가 하면, 우리 나라의 속담이나 풍속을 과감하게 인용하는 등 많은 시도를 하면서 나라의 흔들림을 잡아 보려고 애썼다.
연암은 여느 다른 사대부들과는 달리 표현을 하는 데에서 중국의 고사투어를 쓰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와 인정의 풍습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였다. 이에 연암은 다른 글쓴이들에 비해 겨레 얼이 넘치고 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평가는 글쓴이 입장에서 본 것이지만, 읽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읽을이라 하여 연암이 마음으로 정하여 둔 함축 독자에 한정하여 볼 것이면 상황은 달라질 게 별로 없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그의 읽을이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 아무리 우리의 속담이나 우리말을 생생하게(백화체로) 부려 썼다 하더라도, 그 문자가 한문이었으므로 자연히 일반 무식한 백성들은 읽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점, 이 점으로 하여 나는 연암의 겨레 얼이 새삼 의심스럽다. 백성들은 글자를 알 필요가 없으며 사대부들만이 각성하여 준다면 이들이 떨치고 일어나 백성들을 교화하리라 본 듯하지만, 연암이 사대부답지 못한 사대부들을 일깨우는 데에서부터 일반 백성들이 깨우치는 데까지는 매우 많은 변수들이 놓여 있다. 따라서 연암은 온 겨레를 머리 속에 담아는 두고 있었겠으나 실천적으로는 직접 백성들을 깨우쳐 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훈민정음이 천 사백 사십 일 년에 만들어지고 난 이후 천 칠백 팔십 칠 년에 열하일기가 씌어졌으니 그 사이 삼백 육 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이 흘러 갔고, 그보다 앞서 우리 글자만으로 된 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교산이 죽은 것만 하여도 광해군 십 년(1618)이라 벌써 약 백 칠십여 년 세월이 흘러 갔다. 그러므로 연암의 한문 애용과 집착은 단순한 언어적 습관이나 당대에서는 극복할 수 없었던 현실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연암 개인의 문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무려 백 칠십여 년이나 앞서 살았던 교산 같은 선각자에 비하여 보거나, 삼백 년을 훨씬 뛰어넘은 시대의 한 임금에 견주어 보건대, 연암을 시대의 선구자라 일컬음에는 어디엔가 부족함이 있는 듯하다. 이 근거는 근대 의식의 기본 되는 만민 평등 사상일 터이나 그것이 만민 평등이든 단순한 백성 사랑이든 간에 실제 백성들에게 미친 사랑의 영향을 고려하자면, 적어도 연암은 사대부의 선각자일지언정 온 겨레의 선각자라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암은, 언어 표현인 글은 사람이 리기를 분별하고 따지는 활동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연암 스스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말은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거나 문학의 형식을 구축하는 자재가 아닌 것이다. 연암은 자신도 모르게 형식주의 문학이론에 대립된 의식을 견지하고 있으며, 말을 보는 입장도 전달의 구실(ergon)보다는 형성의 구실(energeia)을 더 강하게 깨닫고 있다. 따라서 연암이 말을 어떤 것으로 보았는가를 더 자세하게 살피는 것은 연암의 한 모습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