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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송 Jun 06. 2024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미국 유학 시절

뜬금없이 과거를 한 번씩 회상한다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은 늙은 증거라고 한다.

내가 늙었나?

색다르게 경험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도 나름 가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31년 전 미국 유학 시절 경험했던 단면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기로 한다.

요즘은 워낙 많은 분들이 미국 유학을 가지만, 그래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1993년 6월. 다니던 회사의 과장시절.

회사에서 젊은 부. 과장을 대상으로 미래의 인재 풀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 일본에 석사학위과정에 엄선된 인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600명의 지원자 중 3명이 선발이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나였다. 모시던 상사들의 신임이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꿈같은 행운이 나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맞다면, 미국 유학은 내게 그중 1번의 기회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회사에서 모든 경비를 지원하는 이유도 있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젊은 시절의 그 소중한 경험 때문에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대학시절 그렇게 꿈꾸었던 미국 유학이 아니던가.


Admission을 받은 대학은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어배너 섐페인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전공은 경영학.

회사의 유학 조건은 석사학위 미 취득 시 모든 회사 지원금 반환. 

이런 조건은 안 붙여도 되는데…^^


일리노이 주립대 어배너 섐페인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1867년 설립된 일리노이 주립대 어배너 섐페인은, 미국 우수 주립대학교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학과에 따라서는 공사립을 통틀어 전국 최상급으로 알려진 것도 많다.

공학(The College of Engineering)은 대학원과 학부 모두 전국 최고 수준이며, 경영학, 교육학, 건축학, 정치학, 회계학, 수학, 심리학, 농업경제, 도서정보학, 신문방송학, 보험 및 위기관리학 또한 괜찮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일리노이 대학 어배너 섐페인은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의 다음으로 미국에서 세 번째로 가장 큰 도서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특히, Grainger Engineering Library라는 일리노이 공과대학 도서관은 미국에서 가장 큰 공립 공학도서관으로 여겨진다.

도서관 내부가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 출구를 못 찾아 자칫 숨 막혀 죽을 것 같다고 느낀 경험도 있다. ^^


일리노이 대학 졸업생과 교수들 중에서 노벨 수상자는 23명이나 되고, 퓰리처상 수상자도 21 명, 포춘지가 선정한 미국의 500대 기업 중 20여 개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이 대학 출신이다. 

유명한 동문으로는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자 겸 회장, 스티브 첸 유튜브 창업자, 젝 웰치 전 제너널 일렉트릭 회장, 맥스 레프 친 페이팔 공동창업자, 마틴 에버하드 테슬라 공동창업자, 마크 엔드리슨 넷스케이프 제작자 등이 있다.


첫 수업과 평가 방법


첫 등교일, 첫 수업은 거시 경제학 (Macro-Economics)이었다.

머리가 거의 다 벗어진 원로 교수님이 수업 일정에 대해, 주 교재, 부 교재 1, 부 교재 2의 Page까지 언급하면서, 향후 수업일자별로 수업할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신다.

그냥 복사해서 나누어 준 내용을 읽어 보고 준비해 오라고 하면 될 것을 1교시 수업 시간을 거의 모두 사용하면서 지루할 만큼 꼼꼼하게 설명하신다. 


평가 방법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신다.

다른 교수님들도 거의 대동소이했다.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기억나는 각각의 평가항목별 평가 점수는 대략 아래와 같았다.


1.    출석 점수 (10점)

       출석은 기본이고, 수업 진행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교수님이 매 수업마다 기록한 후 누계치를 점수화함.

2.    중간고사 성적 (20점)

3.    기말고사 성적 (30점)

4.    수업 시작 후 약 5~10분 동안 수시로 치르는 Quiz 점수 (10점)

5.    매 수업 후 주어지는 개인별 과제에 대한 평가 누적 점수 (15점)

6.    5명 정도로 구성되는 Group별 과제 평가 점수 (15점)

      주로 주어진 과제에 대한 Presentation으로, Group 구성원 각자에게는 모두 동일한 점수가 주어짐. 


장난 아니네! 급 긴장 모드.


일과


수업은 대략 월. 수. 금과 화. 목. 토 별로 3~4 과목 수업을 하면 2시 반 ~ 4시 전후가 된다.

수업을 마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룹 스터디 (Group Study)다. 그룹별로 주어진 과제에 대한 토의를 한 뒤, 발표(Presentation) 자료를 요약 정리한다. 요약 정리와 발표는 돌아가면서 맡게 된다.

그룹 구성원 개인별 평가점수는 동일하게 주어진다. 성실치 않거나, 이상한 멤버를 만나면 낭패다.


그룹 스터디를 마치면, 모두들 자연스레 도서관행이다.

도서관은 평소 새벽 1시까지, 그리고 시험기간에는 새벽 3시까지 운영한다.

단, 매주 금요일에는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TGIF (Thank God, It’s Friday), 금요일만큼은 1주일간의 긴장에서 해방되어 Relax를 좀 해라는 의미이다.


금요일 밤 10시에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도서관에서 학교 인근 Pub (펍: 술을 비롯한 여러 음료와 흔히 음식도 파는 대중적인 술집)까지 일자 행렬이 만들어진다.

스포츠 펍 안에서는, TV로 미식축구 구경하는 사람, 헤드폰 끼고 몸을 흔드는 사람, 담배 물고 당구 큐대 잡고 있는 사람, 맥주 한잔 시켜 놓고 음미하는 사람. 여러 가지 정신 나간 듯한 사람들의 모습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모두 나름대로의 긴장해소와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즐기는 방법인 듯하다. 


평소 저녁 식사 후, 도서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 나름의 의식을 치른다.

자판기에서 숭늉 같은 커피 한잔 뽑아 들고, 담배 2대를 연거푸 피운다.

라지 (Large)가 아닌 레귤러 (Regular) 사이즈 커피 량만 해도 엄청 많기 때문에 담배 1대로는 부족하다. 


도서관에 한번 들어가면 1시에나 석방된다는 기분이 든다. 

책은 읽어도 끝이 없다. 과제를 마치고 다음날 수업을 위한 교재들을 읽다 보면 1시가 금방 된다.


에피소드 1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교수님이 뜬금없이 금일 주제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묻는다.

수업은 언제 하나? 교수님은 계속 학생들을 호명하며 의견을 묻고 자신의 견해를 말하거나 보충한다. 

아! 오늘 수업할 주 교재, 부 교재 1, 부 교재 2 내용들을 모두 읽어 왔다는 전제하에 자유토론을 하는 것이구나! 수업방식을 이해하게 되자, 절망감 속에 갑자기 눈의 초점이 흐려진다.


에피소드 2


“비듬”이 또 안 보인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비듬은 나름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시간이 없는지 머리에 늘 비듬을 달고 다닌다. 그룹 스터디 시간 중 갑자기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기도하러 갔다.

순번대로 돌아가며 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한 번도 하겠다고 나서는 법이 없다.

졸업식 때 안 사실이지만, 학위증 커버 안에 학위가 없이 졸업식 참석만 하고 한 학기를 더 하게 되었다고 한다. ㅋㅋ 한 학기 후에 비듬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에피소드 3


학교 생활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기에, 바쁜 일상이지만 좀 더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학내의 한 서클 (Circle,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동남아시아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모임이었다.


어느 날 서클 공식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 날.

회장이 그날 협의할 주제 (각국별 음식 판매 및 동남아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활용)를 이야기하고 각자 본인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짧게 이야기한다. 모두 관심을 갖고 가입한 서클이기에 앞을 다투어 발표를 하는 등 적극적이다.

나는 김밥과 잡채를 준비하기로 약속했다. 

주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수렴이 완료되자, 다음 모임 날짜가 공지되고 회의는 끝났다.


오늘은 공식적인 서클 모임 첫날이니만큼, 모임 이후 간단하게라도 술 한잔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에 가방도 집에 두고 왔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일어서더니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떠난다. 어디로 가는 걸까?

식사 장소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서둘러 가고 있는 멤버 한 사람을 붙잡고 조심스레 물어본다. 어디로 가야 되지?


의아해하며 돌아오는 대답, “도서관”. 문화 충격 (Culture Shock)이다.


에피소드 4


텀 (Term) 방학이다. 학기 사이 2~3주 정도 기간의 방학이다.

도서관은 정상 운영이다. 다음 학기에는 수업도 다소 많고 까다로운 과목들이다.

방학을 활용, 다음 학기 준비를 미리 해 두어야 하나?


급우에게 조심스레 물어본다. 방학기간 동안 무엇 하니?

“여행!”. 눈을 크게 뜨고 신이 나서 답한다. 다른 친구에게도 물어본다. 똑같은 대답이다.

아! 평소에는 죽으라고 공부하고, 방학 동안에는 모든 것 훌훌 털고 세상 공부하러 떠나는구나!

에라 모르겠다. 나도 여행이다.


여행 코스는, 자동차로 어배너 섐페인을 출발, 애틀랜틱 시티 (Atlantic City), 워싱턴 백악관을 들른 후, 뉴욕 맨해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UN 본부, 자유의 여신상, 할렘 (Harlem), 42번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32번가 코리아 타운 등)을 거쳐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정했다. 공부하러 온 후 처음으로,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행로를 정하고 트리플 에이 (Tripple A: 미국 자동차 협회의 자동차 여행자 보험)부터 가입했다. 

트리플 에이에서 제공받은 지도책에, 이동 동선마다 노랑 형광펜으로 표시도 해 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행기간 내내 아무 문제 없이 잘 달리던 낡은 중고차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도착하자마자 퍼졌다. Pressure Regulator가 고장이란다. 3,000불짜리 중고차가 그렇지 뭐! 다행히도 트리플 A를 가입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 추가로 발생한 호텔비와 수리비를 모두 보전받았으니까.


에피소드 5


기말고사가 내일로 끝난다. 내일은 마지막 2과목 시험이다.

오늘도 밤을 새워야 된다. 

계속되는 시험으로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나 보다.

이 세상에서 눈꺼풀처럼 무거운 것이 없다더니, 초저녁부터 눈이 자꾸 감긴다. 

딱 2시간만 눈을 붙이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험공부를 시작하자.

…………


앗! 아침 8시다. 큰일 났다. 

공부해야 될 내용들을 준비만 해 두고 본격적으로 요약정리를 해 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앞이 캄캄하다.

………….


정신 차리고 가만히 주위를 둘러본다.

생소한 모습들이다. 


와! 서울 집이다. 오늘은 일요일. 회사 안 가도 되는 날.

악몽이었다. 20년 동안 가끔씩 꾸는 악몽. 

실없는 웃음이 나온다.


기분 좋은 젊은 날의 추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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