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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송 Jun 03. 2024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회사 생활

1982년 5월 군대 제대 후, 같은 해 9월, 3학년 가을학기에 복학을 했다.


입대 전 서클 (동아리) 생활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느라 형편없었던 학점 관리를 이제는 좀 신경을 써야 했다. 나중에 만에 하나, 혹시라도 유학을 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현실성 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전체 평균 3.0은 최소한 넘겨야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학교 내에서 영어를 탁월하게 잘하는 학생들의 소규모 모임의 제의를 받고, 한동안 그 모임에 참석해 영어공부를 하기도 했다. 해외 주재원 부모 덕택으로 해외 인터내셔널 스쿨에서 공부했던 학생, 전국 대학생 영어경시대회 수상자, 부산 하야리아 부대 (Camp Hialeah) 내에서 운영되던 미국 대학교에서 학위과정을 수강하는 학생, 외부에서 공무원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학생 등 쟁쟁한 멤버들이었다. AFKN이나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을 듣고 받아쓰기를 하거나, 연설문을 암기해서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방식으로 모임이 운영되었다. 영어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 되겠다고 느낀 계기가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 목표로 하는 학점을 달성하고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가정형편상 희망하던 해외유학을 포기하고,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 5년만 견디면 성공할 것이라는 서클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새기며, 나는 1984년 7월 1일 자로 대한민국 제일의 종합화학회사인 L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입사하기 전, 서울 본사에서 입사 면접시험이 있었다.

면접시험은 면접관 5명과 지원자 5명의 교차 면접 방식이었다.

면접관들은 돌아가면서 지원자 중 한 명을 지명하고, 전공을 포함한 다양한 질문을 했다.


나는 당시 L사의 실세 중 1명이라고 불리던 모 전무님으로부터 “오늘 아침 기상 시각부터 면접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내가 한 행동들을 영어로 표현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좌장이신 전무님이 질문을 하시자, 전무님보다 직위가 낮은듯한 다른 면접관들은 동작을 멈추고 나의 답변과 태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영어 회화 서클 회장 출신인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나는 시원하고 조리 있게 답변을 마쳤고, 전무님은 나에게 해외생활을 한 적이 있는지를 물어보셨다.

해외생활을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 전무님은 놀란 표정을 지으시고, 전무님의 질문과 나의 대답을 지켜보던 다른 면접관들 대다수가 긍정적인 표정들을 짓는 것 같았다.


본사 면접이 끝난 후 퇴계로에 있는 조그만 간이식당에서 면접을 마친 동기들과 서로 수고했다고 격려하며 맥주 한잔을 하게 되었다.

그때 타 사에서 면접을 이미 본 적이 있는 동기 중 1명이 면접 교통비가 타사에 비해 너무 적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면접도 잘 마치고 객기가 발동한 동기들은 인사부로 올라가서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인사과장 면담을 요청한 우리는 인사부 회의실에서 우리의 의견을 피력했다.

동기들로부터 등 떠밀린 나는 “인생을 걸고 선택한 회사가 신입사원들에게 주는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며, 면접 시 회사가 제공하는 교통비는 그 첫인상의 척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자부심을 갖고 입사를 할 수 있도록, 신입사원들에게 지급하는 면접 교통비를 국내 최고 수준으로 조정할 의향이 없는지를 인사과장님에게 정식으로 문의한다”라고 했다.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호기로운 객기였다.


인사과장님은 이 자리에서 당장 답을 줄 수는 없어도, 반드시 회사에 건의해서 우리 후배들에게는 이를 관철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호기로운 술자리와 달리, 다소 긴장된 면담을 마친 우리는 회사 정문을 나오자마자 박장대소를 하며 우리의 객기에 대해 환호를 질렀다.


입사 시험에서 합격 후, 나는 신입사원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신입사원들을 대표해서 사장님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1등으로 합격한 신입사원이 그날 참석을 하지 않았기에 2등으로 합격한 내가 대표로 임명장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인사과장으로부터 들었다.


임명장에 적힌 나의 소속은 “심사부”였다.

동기들은 저마다 발령받은 부서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희망하는 부서를 “기획부”라고 적었다고 하는 형태란 동기는 구매부에 발령을 받았는데, 근무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영업부”를 지원한 지승이는 “감사부”로 발령 났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1 지망 “수출부”, 2 지망 “수출부”, 3 지망 “신설 화장품 사업부 부산 영업부”로 제출한 바 있었다.

나도 낙담하고 있었는데, 형태는 “심사부”가 제일 핵심부서라고 하며 자신이 원했던 부서가 그 부서라고 했다.


심사부에는 사장 직속 부서로서, 심사과, 기획과, 투자관리과가 있었는데, 나는 투자관리과를 선택했다.

입사 지원서 “취미”란에 “야구”를 적어 놓은 나는 입사 이후에 사내 동호인 모임 중 야구부에 가입, 활동하게 된다. 대학 선배인 심사부장님이 당시 야구부 감독이셨는데, 나는 내가 심사부로 발령받은 원인이 취미란에 야구를 적어 놓은 것 때문이 아니었겠나라고 추측했다.


우리 부장님은 내심, 내가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심사과를 선택하기를 바라셨다.

심사과는 전체 사업부의 경영실적을 분석하고, 기획과는 예산수립과 이사회 운영을 맡고 있었고, 투자관리과는 우리 회사에서 국. 내외에 투자해 놓은 투자회사들을 관리,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입사원 3개월은 참으로 지루한 나날이었다.

통상의 회사생활이 그러하듯, 부장, 과장, 선배 사원들 어느 누구도 업무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서류함 속에 있는 서류를 꺼내 알 수 없는 내용들을 읽어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 할 일 없이 제일 앞 열에 앉아 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나마 좌판기에서 커피를 꺼내, 여사원 바로 옆인 내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낙이며 졸음을 쫓는 방법이었다.

많이 졸린 경우에는 화장실로 가기도 하고, 옥상을 지키는 수위와 친해지기도 했다.


당시 나보다 1년 선임인 S 씨와 6개월 선임인 P 씨가 있었는데, 애주가였던 두 사람은 나의 입사를 누구보다도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퇴근 시간이 되면 회사 건물 1층 로비에서 만나, 거의 매일 “주님”을 만나러 가곤 했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 대부분 같은 처지인 친구들과 짬뽕 국물이나 라면 국물을 안주로 소주를 즐기던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2명의 서울 출신 선배 사원들의 환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새벽까지 나를 데리고 다니며 거의 매일 술과 함께 인생을 논했는데, 서울 지리에 익숙지 않은 나를 택시에 태워 내가 기거하던 이모님 댁까지 태워다 주기도 했다.


입사를 하고 나니, 이틀이 멀다 하고 회식이 있었다. 신입사원 환영 회식, 과 회식, 부 회식, 사원 회식 등 늦은 퇴근 이후에도 밤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당시에는 이상할 만큼 집들이도 많았다. 오늘은 이 과장, 내일은 저 선배사원이 집들이를 했고 안주는 늘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고기 맛을 본 땡중처럼, “취직하길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회식이 없는 날은 S 씨, P 씨와의 삼총사 행사가 이어졌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이끌려 다니면서, 나는 그 두 사람과 맛있는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곤 했다. 


3개월 정도 지난 무렵, 처음으로 K 과장님은 나에게 통신문을 하나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통신문 양식 사이에 먹지를 끼워 넣고, 관련 부서에 보낼 내용들을 적어 나갔다.

K 과장님은 내가 적어 온 통신문을 받자마자, 빨간 볼펜으로 몇 부분을 수정한 뒤, 다시 작성해 오라고 지시했다. 나는 날짜, 수신처, 통신문 제목, 내용 순으로 다시 적어 내려갔다. 철자와 문장에 오류가 없는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 적고 내용도 재삼 검토했다. 그러나, 과장님은 여지없이 빨간 볼펜으로 몇 부분을 수정했다.


동일한 과정을 여섯 번 반복한 뒤, 일곱 번 만에 통신문 한 장은 완성되고, 과장님의 결재 도장이 찍힌 뒤, 관련부서로 발송되었다.

이 날 이후 통신문을 작성할 때마다, 일곱 번 반복 작성은 계속되었다.

나름 꼼꼼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매사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럴 때마다, 지도교수님의 얼굴을 떠 올리며, 인내심을 키워 나갔다.

S 씨와 P 씨는 나와 같이 K과장을 성토하며 술자리에서 나를 위로했는데, 많이 위안이 되었다.


하루는 부 회식이 있어 퇴근 후 부서 사람들과 회식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부장님이 내 곁에 다가오시면서 같이 걷게 되었다.

힘든 신입사원 시절을 잘 극복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최초에 수출부로 발령이 난 걸 내가 심사부로 데려온 사실 알고 있지?”라고 말씀하셨다. 한마디로 기가 막혔다. 본인의 의도와 달리, 사람의 인생이 타인에 의해 이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가 있구나! 아무튼 나는 심사부 투자관리과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입사 후 3개월가량은 이모님 댁에서 다니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어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방에서 올라온 신입사원들은 당시 청파동 숙대 인근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하숙방을 같이 사용하자고 하는 심사부 선배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린상고 인근에 있는 하숙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하숙집에는 10여 명의 하숙생들이 있었는데, 대학생과 고등학생도 각각 1명씩 있었다. 까탈스러운 선배로 인해 같은 방에서 생활하던 3년의 기간은 그야말로 수련을 쌓는 기간이었다.


3년의 하숙생활을 마치고 결혼을 위해 하숙집을 떠나던 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까탈스러운 선배는 먼 훗날 사장까지 승진했다. 


나는 주말의 적적함을 해소하기 위해 회사 내 동호인 모임인 야구부에 가입했다. 당연히 부장님의 지시가 있기도 했다. 그룹 내 약 10여 개 팀이 있어 돌아가며 시합을 하곤 했는데, 한 때에는 경쟁이 너무 가열되어 본사가 아닌 지방 공장 내 근무하는 정식 고교 야구부 선수 출신들이 서울로 차출되어 올라와 시합을 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전임 감독부터는, 공장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정식 야구부 선수 출신들을 배제하고 본사의 순수 아마추어 선수들끼리 열심히 연습해서 좋은 성적을 내기로 의견일치를 보면서, 시합이 없는 주말에는 서울과 경기도 내 운동장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자체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 내가 감독을 맡은 몇 년의 기간 동안에는 우승 2회, 준우승 1회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기도 했고, 일본 시니어 팀과 동대문 야구장을 빌려 시합을 갖기도 했다.


이후 심사부 기획과로 옮겨 전사적인 Vision, 중장기 전략 수립 및 경쟁사 분석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심사부 심사과를 잠시 거쳐, 입사 후 5년 7개월 만인 1990년 2월 과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그 해는 승진뿐만 아니라 첫아들을 낳은 해이기도 하면서 수도권에 조그만 집을 장만한 해이기도 했다.


과장 승진 후 약 1년 7개월 동안 맥킨지 컨설팅사의 지원하에, 제로 베이스에서 조직을 평가하고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OVA (Overhead Value Analysis) Project라는 Task Force 팀의 실무과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업무 경험을 통하여 조직을 장기적으로 성장. 발전시키기 위한 기획 능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계적으로 배양된 것 같다.


OVA Project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회사 내에서 가장 큰 모 사업본부 해외영업팀에서 유럽, 중동지역 수출과장으로 근무하게 됨으로써,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무렵 내가 원했던 해외영업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993년 초에는, 입사 후 근무성적과 성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선발하는 해외유학의 대상자로 선발되어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 (Urbana-Champaign 소재)에 파견되어 경영학 석사를 취득하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1994년 8월 귀국 후에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호주 시드니에서 주장한 세계화 전략이 계기가 되어, 5개월에 걸쳐 회사가 지향해야 될 세계화 전략을 수립하기도 했다.


1995년 1월 다시 친정 집 격인 모 사업본부 해외 영업팀에 복귀하여, 미국시장 개척에 주력하다, 1997년 7월에 다른 사업본부 해외영업팀장으로 발탁된 후에는 좀 더 다양한 제품의 수출과 내수 영업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 후 2000년 2월 베트남 호찌민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어, 2005년 1월까지 5년간의 호찌민 지사장 근무를 성공리에 마치고, 2005년 2월, 본사 해외 영업팀 중에서 수출규모가 가장 큰 모 사업부 아시아팀장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뜻한 바 있어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직서를 제출하고 퇴직을 하였다.  


1984년부터 2005년까지 20년 7개월 동안 전사적인 기획 업무, Project 및 해외영업 업무 등 회사 내의 다양한 업무를 통해 개인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고, 조직에도 많은 직접적인 Value를 제공할 수 있었던 후회 없는 값진 제1의 인생을 살아온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독립 후 약 1년 6개월간의 무역업을 추진하던 중, L사 상사분들의 배려 덕분에 국내 타 그룹 계열사에서 4년간 임원으로 근무하면서, 베트남 신설 생산법인의 설립, 공장 건설, 시스템 구축 및 초기 물량 수주 등의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회사생활 중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고, 드물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분들도 나의 발전에 어떤 의미로든 도움이 되었던 분들이었던 것 같다.

나의 인생 멘토 한 분은 L사 직장 상사 중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인데, 지금도 수시로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보배 같은 형님이시다. 


이후 아이들이 성장하는 만큼 세월은 흐르고, 나도 이런저런 조그만 개인 사업을 수행하면서 지내 오다 보니, 어느 듯 호찌민 생활이 25년째 접어들게 되었다. 

2000년 회사에서 호찌민 지사장으로 발령받고 5년만 근무하고 한국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호찌민 생활이 벌써 25년째이니, 이것도 운명인가 보다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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