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범죄를 저지르고 붙잡힌 ‘빈 인간’들의 범죄 수가 증가하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병동과 감옥의 빈 자리가 줄어들자,
당국은 그들에게 기억삭제술을 명령했다.
그들의 기억은 재생해보아도 검은 화면만 표시되었지만,
기억과 연결되어 있던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즉, 각각의 검은 화면 중에서도 연한 검은 기억과 진한 검은 기억의 차이가 있었다.
그들의 검은 기억은 모조리 삭제되었고,
대체된 기억은 모범적인 사회상이 되었으며,
사랑, 증오, 트라우마와 같은 강렬한 기억들은
검은 양복을 입은 재단사의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빈 인간’들은 이후 재단사를 열렬히 사랑하고, 증오하고, 무서워하는 존재들로 탈바꿈됐다.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첫번째 보고는 이 모든 범죄들의 원인이 ‘기억재단술’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내용으로, 가족부가 제출한 것이었다.
가족부장관은 ’기억재단술‘의 한계가 있어 정신이 불안정해지는 걸 의심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불안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또한 대통령이 된 이후, 선거 과정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을 모두 재단해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두번째 보고는 나라의 기억재단술 행태에 대한 자료로, 행정부가 제출한 것이었다.
행정부장관은 당국이 진행한 ’기억재단술‘ 의무화에 따라 이를 받은 국민의 수가 96.8%에 육박한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세번째 보고는 잡힌 범죄자들에 대한 통계가 담긴 자료로, 법무부가 제출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강력 범죄는 청년층 이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특히, 13세 이하의 경우에는 단 한 건의 강력범죄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법무부장관이 말했다.
”강력 범죄를 막기 위해선 모든 국민의 정신연령을 13세 이하로 고정하는 법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그의 말을 듣고 역정을 냈다.
“모든 국민을 초등학생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오?”
법무부장관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모든 국민들이 기억재단술을 받은 지금,
이같은 조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13세 이하로 고정하더라도 그들이 쌓은 지식과 경험은 그대로일 것입니다.
단지 13세 이후의 모든 기억들은 그 일이 13세 때 일어난 사건으로 재단하면 됩니다.
이미 지금도 법률상 모든 국민들의 기억재단술이 의무화되어있지 않습니까?
그걸 일 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받도록만 개정하면 됩니다.”
대통령이 반문했다.
“그럼 모든 나이제한은 어떡한단 말이오. 13세면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이지 않소.“
법무부 장관이 말했다.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법적 성년 나이를 14세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14세부터는 기존의 모든 그 이상의 연령대 제한을 해제하여,
14세부터는 신체 나이로 14세이든, 24세이든, 84세이든 모두 13세의 연령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의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14세부터 신체 나이와 법적 나이가 구분되기 시작한다는 거군요.
재단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법무부 장관이 확신을 보여주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그가 말하길, 사람들은 나이가 어려지면 기뻐하기만 할거라고 합니다.”
작가의 말
기억과 나이를 재단하는 사회,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요?
나이를 잃고 기억이 조작된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