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분들께
대학 합격 발표가 나던 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들은
엄마 그리고 할머니였다.
여느 할머니들이 그렇듯 우리 할머니도 손녀딸이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고 똑똑하다고 믿으셨다.
-할머니, 나 이제 서울 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가!
-오야 내 새끼 서울대네 서울대
서울대는 아니고 서울에 있는 다른 좋은 학교라고 몇 번 설명드리긴 했지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그저 열심히 공부했을 손녀가 기특하고 자랑스럽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으셨던 거였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 친구분들 사이에서 서울대 손녀가 되었다.
2020년 2월, 강단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너무 감사했지만, 스스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공고 마지막 날까지 망설이다가 마감을 삼십여분 앞둔 채, 밑져야 본전이지 마음으로 서류들을 제출했다.
운 좋게, 정말로 운 좋게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직함은 초빙교수.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엄마 아빠 그리고 하늘에서 뿌듯해하실 울 할머니였다. 결과가 나오던 날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나 임용됐어!
-우리 딸, 장하네! 이제 교수님이네 교수님!
직함만 그렇지, 1년마다 재계약해야 하는 거고, 강사 포지션이라고 여러 번 설명드렸지만, 이 역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후로 엄마 휴대폰 속 나는 ‘이교수’가 되었다. 가족 행사, 친구 모임, 심지어 옷을 사러 가서도 교수님이라는 칭호로 나를 소개하셨고, 그럴 때마다 괜히 거짓말하다 들킨 애처럼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때도 많았다. 내가 너무 부풀려져 있어서 이러다 뻥하고 터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주 가끔은 김 빠진 풍선처럼 쪼글쪼글해져서 자취방에 돌아왔다. 이다음엔 무슨 자랑이 되어드려야 하나,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왔다. 큰 딸이라는 이름으로 혼자서 지고 온 책임감이었다.
가끔 엄마에게 어릴 때 나는 어땠냐고 묻는다. 그러면 엄마는 아직도 내가 처음 기던 날, 처음 걷던 날, 처음 ‘엄마’를 말하던 날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도 자세와 표정까지 생생하시단다. 그 때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었다면 매일 사진과 영상을 찍었을 거라며 웃으신다.
나의 처음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크고 작은 나의 처음들을 가장 기뻐해 준 건 사랑하는 가족들이었다. 때로 작고 부족한 시작이었을지라도, 나의 모든 걸음들이 당신들께는 자랑스러운 걸음이었더라.
‘은지 분식’, ‘은희 청과’ ‘유미 식당’. 가게명에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 다수는 자녀의 이름이라고, 인터넷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났다. 엄마 아빠는 내 이름을 달고 불려질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지영 엄마’, ‘준이 아빠’처럼.
누군가의 자랑이 된다는 건 그만큼의 부담도 있지만, 믿음도 있다. 차이라면 부담을 가진 것은 온전한 나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하는 분들이 건네는 마음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부담은 더 나은 내가 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분들이 주신 믿음은 잘하고 있고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을 준다.
누군가는 스스로 만족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 어리고 경험이 모자란 나는
사랑하는 분들의 작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만족이 된다.
내년 할머니 제사 때 들고 갈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책과 아이패드를 들고 카페로 나서본다.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분들 덕분에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