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쇼펜하우어, #니코스마스 윤리학
* 공작새는 다른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모든 공작새는 자기 꼬리가 가장 훌륭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작새는 평화로운 새이다.1)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서 행복론에서 인간의 운명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 요소인 ‘인격’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와 그 함양이 포함되며, 두 번째 요소인 ‘소유’는 인간이 가진 재산과 물질적 가치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는 ‘인상’은 명예, 지위, 명성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행복은 이러한 조건들을 완벽히 갖추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보아야 할까?
버트런드 러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불행이 외부적인 명확한 원인이 없을 때 더욱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그 원인이 주로 잘못된 세계관, 그릇된 윤리, 좋지 못한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개인의 능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이며, 약간의 행운이 따른다면 누구나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행복은 좋은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쟁취하는 과정 속에서 찾을수 있는 것이므로 정복의 대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성공했을 때 언제나 놀라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실패할 때 놀란다. 같은 놀라움이라도 전자는 유쾌하지만, 후자는 불쾌하다. 2)
‘행복’이라는 단어는 본래 좋은 운수를 뜻하며, ‘행운’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생활 속에서 충분한 만족을 느끼며 흐뭇함을 경험하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정복(征服)’은 다루기 어렵거나 힘든 대상을 뜻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의미를 지니며, 맑고 조촐한 행복을 뜻하는 ‘정복(淨福)’과 동음이의어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것이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의 목적이다. 또한, 사람에게 주어진 고유한 기능이나 활동을 통해 선과 좋은 점이 실현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의 원인을 열의, 사랑, 가족, 일, 일반적 관심사, 노력과 체념으로 구체화하여 설명하고, 불행의 원인으로는 ‘바이런’적인 불행, 경쟁, 피로, 죄의식, 피해망상, 그리고 여론에 대한 공포를 제시한다.
러셀은 불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형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청소년 시절 정상적인 만족을 박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특정 만족을 과대평가하며, 자신의 삶을 오직 그 만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만 이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방해 요소가 발생하고, 성격이 다른 성취에 대해서는 부당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3)
아이들은 태어날 때 부모의 사랑과 축복 속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학습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의 애정이 점차 성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고, 학교는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을 제시하며 그러한 기준에 맞추도록 아이를 교육한다.
성장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공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다. 하지만 행복의 기준이 내부적 요소인 인격보다 외부적 요소인 소유와 인상에 더 맞춰지고 강조되는 것이 문제이다. 만약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평가 속에서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게 될 것이고, 반대로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많은 것을 지니고 있을수록 외부의 도움을 덜 필요로 하며, 타인의 인정에 덜 의존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면, 그가 무엇을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슬퍼하는지를 물어봐야 한다.”라고 말했고,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불행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고뇌는 적극적인 것에서, 행복은 소극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의 자극이 많을수록 고뇌는 증가하며, 반대로 의지가 적을수록 고뇌도 줄어들게 되므로, 행복을 넓은 토대 위에 두고 그것에 대한 요구를 높일수록, 불행의 원인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분별 있는 사람은 순간적인 쾌락을 좇기보다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려 할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아르고스라는 괴물의 몸에 붙어 있던 수많은 눈들이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이오’를 끊임없이 감시했고, 이 눈들은 번갈아 휴식을 취하며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제우스의 명을 받은 ‘헤르메스’에게 살해당하고, 헤라는 그의 눈들을 공작의 깃털에 장식했다고 전해진다.
러셀은 공작을 평화로운 새라고 칭했다. 공작이 자신의 꼬리를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공작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어쩌면 공작은 깃털에 달린 수많은 눈을 통해 자신의 자태를 비추며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행복을 논할 때, 개인의 결론과 전제만을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행복의 의미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평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준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어떠한 형태로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이 우리를 바라볼 때, 심한 경우, 우리는 위축되고 불안해지게 될 것이다. 이런 감시가 지속될 때, 정신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일으키고, 신체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게 된다. 만약 그 시선이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거나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르고스라는 괴물에게 감시당하는 수인(囚人)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외부적 기준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으로 그것들은 사회가 규정한 부분적인 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전체는 부분을 포함할 수 있지만, 부분이 전체를 포함할 수 없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개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교집합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한 '나'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우리가 그러한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방향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된다면, 자신에게 행복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르고스의 눈이 타인의 시선을 의미한다 해도, 공작은 자신의 깃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작에게 그것은 그저 꼬리에 달린 장식일 뿐이며, 우리는 꼬리털 없는 공작을 상상하기 힘들다. 공작과 그의 깃털은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꼬리털은 머리보다 앞서 나가지는 않지만, 공작을 다른 새들과 구별되게 만들고, 그를 더욱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준다. 또한, 공작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다른 공작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렇기에 그는 평화로운 새인 것이다. 그러나 공작과 달리, 우리는 인간이기에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일정한 시선과 평가를 적절히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때문에, 불확실한 상황보다는, 예측 가능한 환경을 갖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점의 문제가 될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르고스의 눈은 끊임없는 감시를 상징한다. 반면에 러셀은 공작을 평화로운 새라고 표현했는데, 공작이 자신의 깃털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을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의 평가가 때때로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부적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향성을 정하고 그 기준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다.
행복이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으며, 개인의 성취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결 속에서 형성된다. 러셀은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이자 자유로운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행복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확장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참고도서
<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사회평론, 2005.01.05. >
2) 141p
우리는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보면 곧잘, ‘이게 내 것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가끔 ‘이게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