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작은 조각들로 쪼개져서 단편적으로 저장된다. 이는 우리가 과거의 사건 전체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는 작은 디테일들을 기억해 내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이를 전체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한 안내 단서로 사용한다.
색의 인식
괴테는 '색채론'에서 인간은 눈 속에 빛과 색채를 소유하고 있어서 외부의 빛과 색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우리의 내면의 빛이 외부의 빛과 조응하고 있어서 색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색은 사실 외부세계에 실재하지 않는다. 전자기파가 물체에 닿으면 그중 일부가 반사되어 우리의 눈에 도달하고 우리의 눈은 여러 파장이 조합된 빛들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색이 된다. 즉 색은 빛의 파장들에 대한 해석으로서 인식하는 개개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억의 정의
‘기억’이란 어떠한 자극을 감지하고 이것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소환할 수 있는 정신기능을 말한다. 소환되는 자극을 우리는 정보의 형태로 변환한다. 이러한 기억은 작은 조각들로 쪼개져서 단편적으로 저장되고 기억을 소환할 할 때는 그러한 조각들을 짜 맞추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 후에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모여 전체적인 기억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외부세계를 직접 경험하면서 살아간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어둠 속에서 받아들이는 전기화학적 신호들을 각자의 신경 연결망들을 통해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칸트는 “‘물자체’는 영원히 인식할 수 없다.”라는 말로 인간의 한계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억의 특성에 대해, 올리버 색스는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어서 존재한다. 따라서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루셀 프루스트는 “우리가 경험했던 일들은 삶의 파편적일 것이며, 오로지 기억을 통해서만 삶은 연속성을 갖게 되고 비로소 일관적인 서사를 구성할 수 있다."라고 한다. 반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작가 패트릭 모디아노는 ”기억의 대부분이 허구이며, 그중에서 나머지 조각으로 만들어지는 것만이 진실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기억의 특성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필름을 인화하는 것처럼 당신의 눈이 외부세계를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당신의 눈은 빛을 통해 보고 있는 사물로부터 자극을 받을 뿐이다. 자극이 의식적으로 소환될 때 정보의 형태로 저장된다. 이러한 정보가 바로 기억이다.
기억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첫 번째는 새로운 지식을 외어서 뇌에 입력하는 단계, 두 번째는 외운 것이 뇌에 저장되는 단계, 세 번째는 다시 회상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 세 단계 가운데 어느 한 군데라도 이상이 생기면 기억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 외에도 무의식의 단계도 존재한다. 무의식은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의식되지 않는 것이 특성이지만 정신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며 어떤 계기 속에서 의식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 어떤 시점에서는 무의식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의식적인 것이 무의식이 될 수도 있다.
기억과 감정
우리의 감정은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감정은 대뇌 ‘변연계’의 활동으로 일어나며 식욕과 성욕과 마찬가지로 뇌의 시상하부에서 만들어진다. 감정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과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뇌가 모두 결합하여 만들어낸 무언가이며, 이를 통해 뇌는 우리가 다양한 행동을 취하도록 만든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렇지 않은 사건들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고 한다. 그리고 냄새, 소리, 촉감 등과 같은 감각들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억 일부가 된다. 뇌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정보가 불충분하거나 결정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감정이 개입하여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준다,
기억의 작동원리
기억이 작동하게 되는 원리는 무엇일까? 우리의 뇌는 생각과 행동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기능들은 두뇌가 획득한 정보를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정보를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송하고 또 다른 방식들로 뇌에 저장한다.
뇌와 몸은 머리뼈 아래에서 엉덩이로 연결되는 등골과 신경으로 연결되어 있다. 등골을 기준으로 몸 구석구석에 펼쳐져 있는 신경은 감각 메시지를 몸에서 뇌로, 뇌에서 몸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신경 속에 ‘뉴런’이라 불리는 세포들이 가득 들어있고 뉴런은 세포핵과 세포핵을 둘러싼 세포체, 그리고 세포체에서 연결되는 가지 돌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극받은 뉴런은 가지 돌기에 있는 시냅스를 통해 다른 ‘뉴런’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시냅스’는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화학적 시냅스와 전기적 시냅스로 구분되는데, 시냅스가 많으면 많을수록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에 유리하다. 따라서 뇌의 저장용량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기존의 기억에 새로운 경험과 기억들이 더해지며 계속 변화할 수 있다. 이를 ‘뇌 가소성’이라 말한다.
뇌의 구성
뇌는 대뇌, 뇌간, 그리고 소뇌로 이루어져 있다. 대뇌는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누어져 있고 안쪽에는 기억과 감정을 다스리는 변연계가 위치한다. 이는 시상과 대뇌반구를 연결해 주는 중간 역할을 하는데, 변연계에 가장 중요한 중추는 ‘해마’이다.
인간의 뇌 가장 바깥에는 ‘대뇌피질’이라는 후두처럼 주름 잡힌 층이 있는데, 머리뼈의 위치에 따라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전두엽’은 움직임을 비롯해 복잡한 정신기능이나 의사 판단을 하는 역할을 하고 ‘두정엽’은 촉각을 담당하며 외부로부터 정보를 조합하는 역할을 한다. ‘측두엽’은 기억력, 후각 그리고 청각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후두엽’은 뇌의 뒤쪽에 위치하여 시각 정보를 분석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뇌는 출산에 유리하도록 작고 미완성인 상태로 태어나는데, 성장하면서 지속해서 발달한다. 인간의 배아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수정한 후 분열을 거듭하여 수많은 세포를 생성해 낸다. 이 중에서 뇌로 발달하게 되는 신경세포도 생겨난다. 임신 후 약 1개월부터 뇌의 기본적인 구조가 갖추어지고 배아세포들은 곧바로 뇌신경세포로 발달한다.
임신 후반기로부터 신경세포가 분화하여 이동하기 시작하여 시냅스를 형성한다. 뇌의 구조적 발달은 감각 운동영역에서 시작하여 후두엽, 두정엽, 측두엽을 거쳐 전두엽의 순으로 발달한다. 소뇌는 운동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성격 특성을 조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뇌간은 대뇌와 말초신경 사이에서 동 및 감각 신경으로의 통로 역할을 한다. 정서를 담는 변연계와 더불어 대뇌피질 곳곳에서 감각 정보를 수반하는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면 해마는 이를 토대로 기억의 단편들을 만들어낸다. 단기 및 장기 기억은 동시에 만들어지고 단기 기억의 경우 해마에 저장되거나 장기 기억의 경우 대뇌피질로 분산되어 저장된다. 하지만 해마의 도움으로 다시 회상할 수 있다. 즉 경험이 끝나면 기억은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지지만, 조각된 기억을 회상하려고 할 때 다시 기억이 구성될 수 있으며 이때 익숙한 범위 내에서 사건을 이해하게 된다.
기억이 무언가를 저장하는 일이라면 학습은 그 저장한 무언가를 습득하는 일이다. 학습한 정보를 꺼내 쓰려면 저장되어야 하고, 학습 없이 저장되기만 한 정보는 오래가지 못한다. 중요한 사실들만 골라내 저장하고 나머지 불필요한 정보들을 소거하는 것도 기억하는 것만큼 중요한 뇌의 역할이다. 경험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억한다면 경험하는 만큼 기억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때로는 불필요한 것을 인식하지 않는 것은 신속하게 의사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억의 진정성
많은 사람은 기억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하거나 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이 가장 진정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왜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다른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기억이란 것은 각자의 경험과 관심에 따라 정보를 변형해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뇌는 입력된 정보를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에 가깝도록 해석해 내려고 노력한다. 즉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허언증’ 환자들은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기억이 가장 정확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을 보든지 혹은 경험하든지 그것을 온전한 것으로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억압 기억은 ‘트라우마’라고도 불리며 충격적인 일을 겪고 그 일을 잊기 위해 기억을 억압함으로써 그 일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2007년 미국 콜로라도 대학 연구에서는 실험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기억의 인출 과정을 중지시킬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심지어 가짜 기억을 뇌에 주입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기억을 포장하며 자기 자신을 위조한다. 아마도 4차 혁명으로 뇌 과학이 고도화되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일반화된다면 그러한 가능성이 더 커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분석
만일 우리의 과거 기억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까? 모디아노의 소설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도입부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기롤랑’은 자신이 기억상실증 환자라는 사실 외에는 생각나는 기억이 없다.
제목인 ‘어둠의 상점들의 거리’에서 어둠은 2차 세계 대전시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을 침묵했던 프랑스 ‘비시’ 정부를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와 주인공의 심적 상태를 상징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상태와 대비적인 일을 하는 흥신소 사립 탐정이다. 그는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 머물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자신을 기억할 수 없는 상태는 항상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잃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기억을 찾아 나선다. 그가 발견하게 되는 기억의 단서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기억으로 형태가 변형된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것들 위에 출생기록, 주소, 사진, 책 같은 단서들은 오히려 기억의 진정성을 뒷받침해 준다.
그는 열심히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참담한 기억을 잊기 위해 망각을 선택하여 자신을 보호했다. 그는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될 때마다,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일지라도 그것은 그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실존할 수 없다. 그러한 순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목표 없는 현실 속에서만 살아가게 될 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은 그러한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즘에 인기를 얻고 있는 좀비는 공포영화의 캐릭터인 것 같지만 사실은 시곗바늘처럼 반복적으로 사는 현대인의 특성을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것이기도 하다.
‘받아들임’의 용기
기억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을 때 이전에 인상 깊게 읽었었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뇌 과학으로 접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 기억을 받아들이는 특성을 알게 된 후 그 책을 다시 읽었을 때, 텍스트 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형상화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지우고 싶은 과거의 흔적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억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그것은 더욱 뚜렷하게 새겨지고 나를 따라다녔다. 칸막이 책상 속에서 보냈던 시간은 기롤랑처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혼자서 헤매는 것과 같았다. 그러한 나에게 카를 융은 말했다. “가장 중대한 인생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런 문제들은 절대 해결될 수 없으며 다만 성숙하게 됨에 따라 털어낼 수 있다.”라고. 불안정한 미래 앞에 있었지만 다른 이들의 지식과 경험을 덧입힐 수 있었을 때, 그러한 불안들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불안했고 그들도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가지 않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기억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새롭게 인식한 것들을 토대로 그것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재구성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언젠가는 나의 육신과 함께 기억도 희미해져 가겠지만, 그래도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삶 속에 내가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
사실 필자의 글은 책의 내용을 많이 다루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뇌 과학이라기보다는 자기 계발 서적의 측면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내용은 어떻게 기억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표현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들이었다.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통해 이해해야 하며, 그것은 뇌뿐만 아니라 감각 그리고 내면과 외부의 조우와도 관련이 있고 맥락을 파괴하는 것과 스트레스도 기억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필자는 글을 쓸 때 하나의 문장에서 키워드를 얻으면 그것에 관련되었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경계 구분 없이 수집한다. 주 자료는 종이책이며 필요한 내용들은 손으로 직접 베낀다.하나의 글이 완성되면 퇴고를 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고, 글 쓰는 것보다 오히려 힘든 경우가 많다. 퇴고는 곧 숙고의 과정이다. 그러한 과정 중에서 기억은 또 다른 기억과 연관되게 되고 그것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낸다.
나에게 책이란 기억을 형성하는 것이자 또 다른 정체성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한다.
♧ 참고도서
<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 제레드 쿠니 호바스, 토네이도, 2020.03.20 >
< 생각은 어떻게 행동이 되는가. 데이비드 바드르, 해나무, 2022.02.14 >
< 우울할 땐 뇌과학, 앨릭스 코브, 심심, 2018.03.12 >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문학동네, 2010.05.17 >
우리의 운명은 겨울철 과일나무와 같다. 나뭇가지에 다시 푸른 잎이 나고 꽃이 필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을 꿈꾸고 그렇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