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안다. 그렇다. 내가 지금 가만히 어깨를 안고 있는 것은 너의 대역일 뿐이다. 진짜 너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에.
상상계와 실재계 그리고 상징계
오랫동안 기다렸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얼마 전에 출시되었고, 특유의 애매모호한 표현은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그래온 그것처럼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설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 앞에서 방황하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상상계'와 '실재계', 그리고 '상징계'로 대표되는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과도 궤를 같이하며,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이기도 하다.
먼저 상상계는 개인의 주체적인 영역을 가리키는데,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인식을 통해 개인에게 받아들여지는 영역을 말하는데,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상상계에는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상상계는 자아를 중심으로 자아의식에 수용되는 이미지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실재계는 무한한 에너지의 상태이며, 아무런 규정성이 없다는 특성 때문에 무한대이면서 동시의 무의 상태로 혼돈을 지칭하는데, 이와 대조적인 상징계는 실재계의 에너지가 굳어진 상태이며, 그것은 문명화, 사회화라고도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계는 상징계에 지배받는 이미지들의 질서이고, 실재계는 상징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질서이기 때문에 상징계는 상상계와 실재계를 가로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주체와 이데아
'그 도시는 원래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네 안에 예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그걸 눈에 보이는 것,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으로 구축해 내는 데는 나도 적잖이 힘을 보탰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언어 이전과 이후로도 구분할 수도 있는데, 라캉이 정의하는 '주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외부 세계를 마주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위치가 아니라 '타자'에 의존하지 않으면 주체 형성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이러한 '타자'는 주체를 소외시키면서도 자아 형성을 도와주기도 하는데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이미지의 역할을 '이마고'라고 부른다.
한편 '라캉은 상징계를 지탱하는 구조의 인격화된 지점을 '대타자'라고 칭하는데, 그것은 상상계에 속하는 타자와 달리 언어의 장소로 정의되며 호명을 통하여 주체를 발생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상징계로 지칭되는 문명은 분절된 음성언어의 사용으로부터 시작하게 되었고, 금지의 언어가 개입하여 질서를 확보하는 현상이 누적되면서 법과 규범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것들은 상징계의 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캉의 정의에 의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기보다는 '금지'의 언어로 지칭되는 상징계에 포섭되어 불안해하는 존재에 가까울 뿐이다.
경계 너머,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어떤 도시가 있는데, 그것은 순수한 가치들이 그 개념대로 구현된 장소이다. 강을 경계로 도시를 구분하고 있는 벽은, 세계를 남북으로 절반씩 나누고 있는데, 한쪽은 이데아의 세계이고 다른 쪽은 이데아가 투영된 '이미지'이다.
이데아는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 곧 '관념'을 말하며 세계의 너머에 있는 실재이자 모든 사물의 원형을 말하는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는 사물들의 본성들에 고정된 원형으로써 영원하고 불변하는 속성을 가지지만, 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오직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만 출입을 허용하고,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야만 한다는 규칙이 존재한다.
주인공 ‘나’는 17세에 ‘너’로 지칭되는 운명의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주인공이 보고 있는 자기 모습은 그림자이며 대역에 불과하고, 본체는 벽에 둘러싸인 경계 너머에 있는 도시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내'곁을 떠나버린다.
그림자와 무의식 그리고 욕망
'내 손은 조금씩 너의 스커트 안으로 뻗어간다. 너의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에 손이 닿고, 그런 다음...... 아니, 사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겁성 따위보다 훨씬 상상력을 발휘하기 쉬운 종류의 일이니까.'
그림자에는 보통 빛과 대비되는 어둠의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는데, 감정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영역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것은 우리와 일체를 이루고 있는 요소이면서도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루키는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본체와 그림자를 구분 짓는 것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과 욕망 같은 요소 속에는 강렬한 쾌락이 도사리고 있고,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고통도 내포되어 있는데, 라캉은 이를 '주이상스' 즉, 향락이라고 불렀다. 특히 꿈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잠재된 감정과 욕망의 파편으로써 무정형 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도시의 존속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그곳의 질서와 문법에 맞춰 형태를 만들고 소멸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떤 스토리가 있는 환각이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 흩어지어 있는 감정과 욕망을 개체화, 수량화하여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이러한 야만스러운 무질서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언어와 문법들을 만들어냈다.
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욕망은 결핍으로 생성되며, 이 결핍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다. 라캉은 욕망을 ‘욕구’, ‘요구’, '욕망’으로 구분한다. 욕구는 생물학적 본능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순수한 육체적 생존을 위해 충족되어야 할 생물학적 필요성이다. 그러나 인간은 상징계에 진입하게 되면서 욕구를 요구의 차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요구는 어떤 것을 할 것을 청하는 행위로, 타자가 개입되면서 욕망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욕망은 인간의 개인적인 신체나 감정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그것에 이르지 못하는 결핍으로 생성되므로 인간은 욕망으로 근원적인 결핍을 메우려고 한다. 즉 주체는 독립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욕망은 빈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의 완벽한 충족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사실상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실재계는 이러한 상징화에 저항하는 무엇으로 정의되는데, 그곳은 쾌락의 원칙 너머에 있는 반복적 강박의 동인이며 존재를 드러낼 뿐 포착되지 않는 특징이 있고, 언어와 문화로 특정되는 상징계의 그물망이 포착하지 못하는 상징계의 구멍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멍이 판타지로 치장되었을 때는 욕망의 미끼, 즉 대상 a가 된다고 한다.
'나'는 그토록 고대했던 ‘너’를 도시에서 재회하게 되지만 그녀는 주인공을 꿈을 읽는 역할로 인도하는 맡은 바 임무 외에는 어떠한 감정의 여지도 느끼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으며, 도시의 벽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없는 짐승인 단각수뿐이다. 하지만 도시의 반대편 혹은 그 아래쪽에는 꿈틀거리는 실재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고, 그것은 상징계를 관통할 수 있는 취약점이기도 하다.
'나'는 ‘너’에 대해 사랑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범하고 싶은 욕망에 매여 있었고, 도시의 엄격한 도덕과 윤리적 기준은 주인공에게 욕지기를 느끼게 했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현상을 ‘구토’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그러한 반발심은 ‘열’을 앓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벽을 넘어서
“애당초 이 도시를 만들어낸 건 당신 아닙니까. 당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어요. 실제로 조금 전, 눈앞에 우뚝 선 단단한 벽을 무사히 통과했고요. 그렇죠? 중요한 건 공포를 이겨내는 겁니다. 게다가 수영은 당신 특기 아니던가요. 숨도 오랫동안 참을 줄 알고.”
'나'는 꿈을 통해 타인의 욕망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는데,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 그림자와 다시 만나게 된다. ‘나’는 그림자로부터 이상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도시는 가짜 이야기가 가득 찬 곳이며, 그곳은 구성부터 모순투성이라는 진실을 듣게 되었다. 도시의 실체를 마주한 후 '나'는 그림자와 함께 탈출하기로 마음먹지만, 벽은 자유자재로 모양과 위치를 바꾸며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깊은 웅덩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깥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밑바닥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벽 아래를 헤엄쳐나가야만 한다. 소설에서 웅덩이는 도시의 불완전성이며, 상징계의 구멍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곳은 욕망과 더불어 주체를 죽음과 대면하게 만들고 또 하나의 장애물이자 탈출구인 실재를 만나게 한다. 주체가 도달해야 할 그곳은 욕망의 진실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질서 잡힌 긴장 상태가 붕괴되어 이완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죽음충동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써 모든 유기체가 시작되었던 근본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은 이러한 충동에서 상징계가 해체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정한 삶이란 그러한 허상에서 벗어나 원래 있었던 실재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하루키는 그러한 개념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연의 웅덩이 앞에서 그림자는 웅덩이를 빠져나가 바깥 세계로 돌아가고, '나'는 오래된 꿈을 읽기 위해 도시 안에 그대로 남기로 한다. 소설의 2부와 3부는 각각 바깥 세계로 탈출한 그림자와 도시에 머무른 본체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과 균열
“하긴 그럴지도 모르죠. 이 현실 세계는 그를 위한 장소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피를 나눈 가족을 포함해 그 누구도 그를 올바르게 이해해주지 않아요. 그가 지닌 특별한 능력을 살리려면 오히려 저쪽 세계가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된 '나'는 도시에서처럼, 꿈을 읽을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 중년으로 불리는 나이에 접어든,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나의 물음에 답해왔던 그림자는 원래대로 말 없고 납작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는 꿈을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단조로운 생활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상사에게 사직서를 내고 한적한 시골로 들어가, 도서관장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이전의 도서관장인 '고야스'를 만나게 되면서 일상적인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고야스는 사실 유령이었고, 살아생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이후 그는 지역주민을 위한 도서관을 세웠고, 자신의 후임자로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던' 고야스의 감정에 공감하게 되면서 그를 한층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도서관 관장의 업무를 하던 중에 책 속의 세계에 빠져 현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옐로서브마린'으로 지칭되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유령인 고야스는 현실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고, 서번트증후군 환자인 '옐로서브마린' 소년 또한 정상성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위치에 서 있다. 그들은 현실의 확고한 사실성과 대립하는 불확실성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상징계의 질서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불길함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세계는 확고한 사실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러한 요소들을 환각적 속성으로 간주하여 자신들의 질서 속에 은폐하려 하지만 그러한 일관된 흐름이 멈춰서는 지점에서 환영은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고, 그것은 상징계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게 만든다.
'옐로서브마린' 소년은 아무런 이유 없이 현실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데, 소년의 가족들은 합리적인 논리로 이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누구도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환영 또한 현실의 요소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주인공은 카페 여주인과 가까워지게 되는데, 그녀는 도시에 있는 ‘너’의 분신으로써 남편의 외도행위로 인해 사랑에 대한 결여를 경험했고, 그 충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의 만남으로 인해 다시 도시의 ‘벽’을 떠올리게 되고 꿈속에서 '너'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 역시,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욕망과 자아
‘짐작건대 현실은 하나만이 아니다. 현실이란 몇 개의 선택지 가운데 내가 스스로 골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3부에서 '나'의 본체는 도시 속에서 껍질 속에 갇혀있었던 오래된 꿈들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러한 능력이 생긴 것은 소년이 환영의 형태로 '본체인 '나'와 일체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에게 깨닫게 해 주었고,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본체인 '내'가 분신인 그림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를 믿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꿈을 읽는 자리는 자신이 계승하겠다고 말한다.
소설에서는 현실과 이상, 실체와 허상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지만 하루키는 어느 쪽이 본체고, 그림자인가를 구분하는 그것은 생각하는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세계에서 개별적인 실체를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며 그러한 실체들을 묶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라고 드러내고 싶은 것 같다. 그것은 헛된 망상을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 세계에서 촉발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애'의 근본적인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능동적 태도는 주체가 결여에 대응하는 환상의 대상을 통해 더 세계를 더욱더 자세히 탐구할 수 있게 만들고, 세계의 구조를 자신의 언어를 통해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각기 다른 세계에 있는 자기 모습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나아갈 길은 저절로 뚜렷해지게 된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욕망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분신을 그곳에 두고, 그 벽을 넘어 진정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 참고도서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2023.09.06 )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 ( 장용순, 이학사, 2023.10.10.)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백상현, 책세상, 2014.08.31. )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 김석, 살림, 2007.11.20. )
정신분석 입문 ( 지그문트 프로이트, 돋을새김, 2015.07.25 )
시간은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씩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솔직히 말해 ‘빙글빙글 돈다. 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