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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징포스 Aug 07. 2023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미완성, #삶


.* 런데 깨어보니 나 혼자더군

    그 새는 날아가버린 후였어

    그래서 나는 불을 지폈지

    노르웨이 나무라서 잘 타더군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

 

 1997년,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이 부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내 아버지가 다녔던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나라 전체가 빚 때문에 휘청거렸었고,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상실'이라는 단어만큼 그 시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2019년,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었을 때 대한민은 우호국에게서조차  국경을 폐쇄당했었고, 교민들은 본국으로 쫓기듯이 돌아다.  예전에 당연했던 것들 더 이상 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고, 텅 빈 공항으로부터 지방사무소로 파견을 떠나야만 했었다.

 때의 나는 길 떠나는 '성북동비둘기' 마냥, 텅 비어있는 거리에서 익숙했던 모습들을 되짚고 었다. 갑자기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사람들까지 그리지기 시작했다.


오늘날엔  자기 계발서와 부에 대한 지식들이 행하고 있고, 오직 그것만이 답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실상은 이전보다 더욱 까다로운 조건들을 요구하고  는 것에 불과하. SNS는 종교를 대신하고 있고, 인플루언서들이 전문가보다 더 영향력 가지는 시대돼버렸다. 그들은 꿈과 희망을  만들어내며 사람들을 어루만져주고 있만, 그것은 일반적이지도 않은 평균점에 자신을 붙들어 매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는 것에  불할 뿐이다. 그건  애초부터 평균적인 사람들이 감당할만한 항목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 올라가면 갈수록  퀘스트의 난도는 높아만 고, 이제는 희망이란 단어 점점 낯설게만 느껴진다.

우울 기분갑자기  엄습해 올 때면 나밖에 모르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냥 슬퍼지고 싶어 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책장에서 다시 꺼내 들고, 예정되지 않았던 어떤 장소로 무작정 떠난다, 그리고 눈에 띄는 아무 카페에 들어간다. 이왕이면 콜드브루가 시그니처인  전문점이  좋을 것이다. 깔끔하고 목 넘김이 좋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이리저리 책장을 뒤적이다가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을 노트에 끄적여본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이지만, 익숙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손끝에서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데까지 잔잔한 파문이 전해는 것만 같다.


노르웨이의  숲


"기억이라는 건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내가 그 초원에 몸을 두고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작품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다. 하루키는 소설에서 비틀스의 동명 노래를 언급하고 있는데, 가사를 해석해 보면 화자는 우연히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있기 원하면서도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고 감정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이 내킬 때만 그를 원할 뿐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출 것을 화자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고, 그러자 여자는 새처럼 떠나가 버렸다.

 하루키는 틀스의 노래를 듣고, 노르웨이란  단어에서  느껴지 특유의 어감으로부터 어떤 인상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것  뚜렷하게  어떤 것이라고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것은 푸가처럼 음부터 끝까지 작품에서 반복는데, 그것은 함께  있으면서도 좁혀지지 않는 심리적 거리감을 반영하기도 하며, 이는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고, 더 나아가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에까지 확장된다.


 주인공의 이름은 와타나베이며,  37살의 '나'는 비행기 안에서 들리는 익숙한 멜로디를 듣게 되면서 희미하게 기억 속에 아있는 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되는데, 막상  떠오르는 것은 리운 사람들이 아니라 그 주변을 둘싸고 있는 풍경에 대한 것  뿐다. 그렇게  소중했던 것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와타나베는 묻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게 는데,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그녀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다.


 작가의 다른 글에서는 일본에 오게 된 후,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 노르웨이인의 이야기 는데, 그것이 모티브가 되었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그리운 지난날대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빌겠어요. 안녕!"
"안녕!" 하고 나도 인사했다.


삼각관계


"사실, 나와 나오코 사이에 공통된 화제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마셔도 보고 탁자 위의 것을 만지작거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기즈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소설은 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시작되며, '나'로 지칭되는 와타나베와 주인공의 유일한 친구인 '기즈키'와 그의 여자 친구인 '나오코'와의  관계에서 이야기는 시작다. 이러한 삼각구도는 작가가 의도한 상징적 코드임과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노르웨이의 숲, 소꿉친구인 나오코와 자신들만의 시공간 속에만  머물러있었던 기즈키는 세상과의 경계점에 서 있는 와타나베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그동안 두려워하기만 했던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지만, 성장통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였다. , 는 어른이 되면 거쳐야 할 관문 앞에서  좌절하게 된 것이다. 세대를 달리하고 있더라도 그 관문이라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고민과 유사한 것 아니었을까?


 나오코는 기즈키의 죽음에 힘겨워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가 죽기 전에 만난 사람이 여자 친구인 자신이 아니라 와타나베라는 실에 한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와타나베와 거리를  두려 하면서도 그를 통해 기즈키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자신을 그렇게 대할수록 기즈키의 죽음과 남아있는 그녀의  삶에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곁을 지키다  나오코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나오코의 20세의 생일날, 둘은 맺어지게 되는데, 그녀는 와타나베가 자신의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게 될수록 기즈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와타나베는 한편으로는 선배인 나가사와와 그의 여자친구인 하쓰미와도 삼각구도를 이게 되는데,  나가사와는 자기 계발서들의 모든 이상향을 충족시키는 사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들을 잘 이용하면서 가장 최적의 결과를 끌어다. 미는 그와 대극적인 위치에 있으며,  감정에 예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범한 미래를 꿈꾸고 싶어 지만 나가사와는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사랑까지도 과감하게 끊어내는 사람이다. 그들은 한편,  '나' 에게 내재하여 있는 자아의  다른 형태기도 하와타나베는 나가사와 가장 가까운 위치 있으면서 극단적인 합리성에 반감을 게 되고, 상처받으면서도 나가사와의 곁을 지키려 하는 하쓰미가 되지 않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와 세심한 배려는 와타나베에게 , 모자랐지만, 그리운 어떤 것을 떠올리게 한다

 나가사와와의 이별로 하쓰미는 자살하게 되고, 나가사와를 용납할 수 없었던 와타나베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설을 지배하고 있던 정삼각형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그것을 받치고 있던 다른 축까지 완전히 붕괴해 버리고 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순진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도 오랫동안  생각해  내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뒤흔들어놓은 것은  내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나' 자신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청춘의  다른 이름, 방황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과거에 대한 것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불확실한 미래에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사실들을 받아들이면서 아이들은 서서히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성장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자살하거나 회피하는 삶을 선택할  뿐이다.

 나오코는 과거에 머무른 채로,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고, 어두운 심연에  사로잡힌 채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녀는  와타나베와  함께 삶을 이겨내기보다 죽은 기즈키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미도리는 그들과 다르다.  '미도리'란 이름은 녹색을 뜻하며, 그 의미 속에서 삶과 생명이란 상징을 내포하고 있,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캐릭터로서. 통속적인 허세에  갑갑해하고  느끼 대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든, 곁에 남자친구가  있라도 자신의 마음과 욕구에 솔직 싶다.


 소설의 배경은 '58 혁명'이 시대의 조류였고, 당시의 학원가는 공산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혁명의 진취적인 이상을 통해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지고 평화로운 세상이  눈앞에 올 것처럼 여겨졌 , 와타나베에게 허울뿐인 모습 포장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기존 세력을  '돌격대'라  불리는 인물로  희화화하고 있으면서 혁명을 부르짖는 세대에 대하여  냉소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데, '상실의 시대'의 역자인 유유정은 이러한 관점에  지적을 하고 있. 하지만 인간의 모든 역 속에서 혁명의 동력이 계속되지 않을 때, 그들 역시 전과 를 바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진정한 혁명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은 날마다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통해 그러한 과정에 있는  것이  바로  삶이고, 낭만이고, 청춘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렇다면 청춘은  나이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상황을  맞이하는 삶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수 있 것이다.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나가사와는 하쓰미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으면서, 자신이 보고 싶은 이상향만을 좇으려고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없.  의미한 섹스와 자위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미도리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딪히는 모든 삶의 문제들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악착같이 매달린다. 그것은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를 사랑하든 말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바라봐주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도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나오코 자살로  인해,  그녀를 정상적인 상태로 복귀시키려는 모든 노력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다. 그렇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정처 없이 길을 떠나게 다.

 방황의 여정 가운데서도 생리적인 욕구는 계속되었고, 먹고살기 위하여 머무르던 곳에서 정신없이 해야만 했다. 그렇게 삶은  와타나베에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었고, 침내 `나'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작가 삶이  아름다운 것만 아니며, 때로는 잔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연이은 자살로 상실감과 허무에 빠버린 독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비극의 치를 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로써 기중기와 같은 것을 이용하여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수법을 말한다.

 와타나베가 뇌졸중에 걸린  미도리아버지에게  을 언급 대목이 나오는데, 작가는 나오코와의 영적인 매개체 레이코를 등장시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형상화하, 혀있었던 모든 갈등일소해 버린다. 

 더 이상 삶과 죽음은 모순적인  것이 아니고 이성과 감정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주위를 둘러싼 모든 인연은 하나로 수렴되었고, 와타나베는 동안 겪어왔던 실연의 고통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그에게 남아있는 하나의 가능성, 미도리와 함께 삶을 나아가기로 음을 먹는다.


 전화부스 안에서 과거의 추억들을 쉽게 놓지 못하고,  괴로워며, 미도리를 애타게  부르는 모습으소설은 끝을 맺지만, 액자식 구성의 특징 때문에 이야기는  비행기 속에서  지난날의 기억을 회상하는 37살의 와타나베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삶이라는 숙제 속에서 인간은 그렇게 다시 방황하게 되고,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 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 참고자료


<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2010.08.25.>



죽음은  삶의 반대쪽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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