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변증법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by 비루투스

* 죽어 빛을 잃은 반딧불도 살아 반짝이는 반딧불도 그 모두가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1)


나는 글을 적을 때면 습관적으로 유키 구라모토의 곡을 틀게 되는데, 서정적인 멜로디와 반복적인 리듬을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부터 집중해서 글을 쓰게 된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인상적인 구절을 받아 적고, 떠오르는 것들을 이리저리 정리하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공명하게 되는 어떤 지점이 있다. 일단 첫 문장이 나오면 몰입해서 글을 쓰곤 하지만, 마지막 문단에 이르게 되면 보이지 않는 벽에 반복해서 부딪치다가 그 앞의 단계들을 모두 합한 시간만큼 한참 동안을 멍하니 있게 되고, 낯선 골목에서 길을 헤매었던 것처럼 익숙했던 멜로디가 갑작스럽게 느껴질 때, 복잡하게 얽혀있던 실마리가 서서히 풀리면서 글에는 어느 정도의 틀이 갖추어지게 된다. 스마트폰 화면으로 글의 맥락을 살피면서 오류를 바로잡고, 문장을 추출하여 키워드를 정해 본다.


글을 다시 읽어보고 자연스럽게 읽힌다고 생각되면, 발행버튼을 눌러 글을 전송한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끝났다. 나머지는 해석에 달려있을 뿐이다.


'파반느'와 '시녀들'


오늘은 라벨의 '죽은 왕녀의 파반느'라는 곡을 듣고 있다. '파반느'는 여성형 명사로 장중한 분위기의 춤곡을 말하고, 그 단어의 어감은 곡에 특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 '죽은 왕후를 위한'이란 수식어에는 의미심장한 절절함이 숨겨져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 곡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지만 박민규 작가는 독특하게도 소외된 자들의 시선에서 그 곡을 해석하여 소설을 구상했다.


나는 뮤직앱에서 같은 곡을 랜덤으로 설정하여 원곡과 그것을 리메이크한 것을 비교해 들었고, 작품의 모티브를 역추적하여 다양한 시선에서 살펴보고 싶었다.

원곡자인 모리스 라벨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본 후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했다고 알려진다. 이 그림의 특징은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시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각각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작품 속 인물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가 그 대상일 수도 있고, 그림 밖에서 감상하고 있는 관객도 주인공의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죽은 왕녀'라는 목적어가 붙은 것으로 보아, 라벨은 그림 속의 '마리가리타 테레사'공주의 삶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그녀는 열다섯 때 외삼촌 레오폴드 1세와 정략결혼하여 네 명의 아이를 출산 한 뒤, 2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림은 공주가 5살이었을 때 그려진 것인데, 화가는 사랑하는 조카를 바라보는 심정을 듬뿍 담아 그린 듯하다. 그와 달리, 라벨은 행복했던 시절과 대비되는 비극을 떠올린 듯, 곡에서는 애잔함이 서정적으로 묻어나는 것 같다.


아름다움의 모순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 어디선가 잔잔히 물이 끓는 소리, 창을 두드리던 12월의 바람과... 출입구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 뛰던 소리, 가슴이 뛰던 소리, 가슴이 아플 정도로 내게 머물러 있던 그 소리가 지금도 느껴진다. 2)

이별을 앞둔 두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서로의 눈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그 순간은 짧을지라도 두 사람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여운이 남는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 맞닿은 가슴에서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 그리고 둘만의 호흡과 스텝은 주변의 흔한 소리들과 어우러지면서 한 곡의 파반느가 완성되었다.


작가는 '가슴이 뛰던 소리'라는 구절을 반복하는데, 처음에는 '뛰다'라는 동사를 강조하고, 두 번째는 '소리'라는 명사를 강조하는데, 사랑으로 벅차올랐던 둘만의 감정을, 다른 감정의 각도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각기 잘 묘사하고 있다. 그는 같은 형식의 문장에다가, 다른 품사를 강조함으로써, 대비되는 감정의 추이를 잘 살려주고 있다.


애처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내용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했었지만, 작가는 그러한 것을 무너뜨려버린다. 그는 의도적으로 소설의 표지그림인 '시녀들'에서 가장 못생기고 소외된 시녀를 확대한 사진을 실었다. 사실 그녀는 원작의 그림에서는 마리가리타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장치의 일부, 즉 도구에 불과했지만, 작가는 오히려 공주를 축소하여 그녀를 더 부각했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여주인공에게 '못생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애잔한 분위기 감도는 장면과 못생긴 여주인공과의 매칭은 중요한 무언가가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내내 불편한 감정들이 있었다. 사실, 못생겼다는 말은 굉장히 폭력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접두사 '못'은 '동사가 나타내는 동작을 할 수 없다거나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부정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못생겼다'는 말은 외모에 대한 평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므로 인권적인 측면에서도 상대방에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작가는 진정한 사랑은 외모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요한'을 통해 드러내면서도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작품 전체를 통해 계속적으로 던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기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 인간들에게 꼼짝 못 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3)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나도 역시 그들처럼 보잘것없는 인간이었구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무시하고 조롱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자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들처럼 대놓고 사람을 괴롭히거나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동등하다고 인지하는 쪽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미는 외면과 내면이 일치하는 것에 보다 가까운 것이고, 따라서 외모만큼 내면도 가꿔나가면서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라 생각해 왔고 그러한 기준을 어느 정도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성격이 좋거나 탁월한 재능이 없다면, 적어도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한 관점은 핑계일 뿐이며, 결국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당신들은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살아온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내용이 전개될수록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한다. 당신은 누군가를 부러워하기 때문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고, 부끄럽기 때문에 스스로 채찍질하며, 결국 자가발전으로 자신의 삶을 소진하며,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채 더 힘든 세상을 살게 될 것이라고........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경험했던 실존조차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자신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생긴 콤플렉스의 산물과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오랫동안 숨었던 것이었고, 그러한 기준에 속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하며 살아왔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외모의 미추는 우리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겉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아름답지 못한 말이나 행위로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그들은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표면적인 기준으로써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위안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도 어둠 속에 매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워야 해야 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는 그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아름다움의 정의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수 없어. 4)

양주동 박사는 '아람'(我有, 자기가 가지는 것)과 '답'( '같다'라는 뜻의 접미사 )는 의미로 '아름답다'를 풀이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는 것 같다'라는 뜻에서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파생되었고, 이를 풀이하면 '자기의 가치 기준에 맞는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자기를 잘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이 곧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지경을 차츰 넓혀 가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개인을 대상화하여 물적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체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계하였다.


미디어 속에 전문가나 인플루언서는 항상 걱정 근심 없고, 하는 것마다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살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그들처럼 살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나와 기준점이 다른 사람들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하는 직업과 관계된 것을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돈에 익숙할 것이다. 그것은 책을 한 달에 100권씩 읽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잘하는 것을 하고 있을 뿐, 그런 사람들 중에서는 평범함을 무리해서 어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상적인 삶을 참고하고, 존중하는 것에도 권장할만할 측면이 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무리를 해가면서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애초에 나와 사정과 상황이 다른 사람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들은 그저 주어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몫을 찾아갈 수 있도록 맡겨두면 되는 것이다.


상상력의 해석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5)

남주인공은 미남인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박색의 어머니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있는 여주인공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움츠려 들었지만, 점차 주인공을 신뢰하게 되면서 마음을 열게 되고, 그렇게 가까워진 둘은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여 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남 주인공이 비난받게 될 것을 우려했고, 두 사람의 사랑이 훼손되는 것보다 그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자 그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사고는 그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보편적인 사랑의 영속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할 때마다 새로운 탐구의 대상임과 동시에, 일상 속에서 느끼는 것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축복이며, 그것은 가슴과 가슴으로 맞닿아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감정을 배제하고 분석적인 사고로 이를 대하다 보면 그것은. '꽃을 위한 서시'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형식적인 틀에 갇혀 그저 그렇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사랑의 품사는 형용사에서 명사로, 사랑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에게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갈가리 찢긴 꽃의 잔해를 더 이상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꽃의 시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어떤 기준을 정해 보는 것은, 삶에서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 중의 하나이다. 물론 모든 것을 한 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단 주어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고,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스스로 정한다는 것이고, 그것에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사랑은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어떠한 가치부여를 하는가에 따라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것에 현실이라는 요소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것에서도 그럴 것이다.


여주인공은 사랑을 하면서도 타인의 해석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남주인공과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실상은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인,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것을 잃게 될까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주인공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고, 그에게 그녀의 외모는 약점이 아니라, 사랑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연민을 사랑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남주인공은 그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죽기 전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있다.


작가도 좀 더 상상력이 있었다면, 외모보다는 다른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둘이 맺어지는 결말을 시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을 읽은 후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결말과 소설적인 여운으로 끝을 맺는 것에 대해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았는데,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이라는 문장에 의미를 좀 더 부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마무리되었다면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던 이 특별한 메시지가 진부함 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행복에 이르는 길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삶의 기준들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앞으로도 바뀌는 것은 바뀌고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법과 제도, 문화와 의식의 변혁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언제나 우리 앞에는 어떤 장벽이 있었다. 그것은 가까이 닿을듯하면서도, 다가가면 멀리 달아나있었고, 멀다고 하기에는 내 생활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 앞에서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장 힘들고 스스로가 비참하게 여겨졌던 시기에 예술을 접했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딱히 갈 데도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을 기웃거리다 공연이나 전시 홍보를 보고 찾아가곤 했었다. 공공장소에서 연주되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가 있었고, 현대미술을 통해 관점의 파괴를 경험했다. 그리고 현대무용을 보면서 도약을 꿈꾸기도 했다.

그들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들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러한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고,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내 나름대로의 예술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왔던 편견과 싸우는 것, '반항'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고 그 대상에는 '나' 자신까지도 포함된다.

나는, 늘 그래왔듯이, 행복의 종착지까지는 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다시 깨어지고, 깨어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가장 익숙한 패턴이고, 그것을 통해 의미를 추출하고 문장으로 엮어가는 것은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매달기도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을 어떤 위치에 두고, 어떤 맥락에서 해석하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을 누구보다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라. 그것이 끝난 후에는 상상력을 그 안에 계속적으로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길 위에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아름다움의 변증법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서문: 예술과 글쓰기의 공명
-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과 글쓰기의 습관
- 감정과 생각의 공명 지점
- 글쓰기의 과정과 몰입의 순간

II. 파반느와 시녀들
-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감상
-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공주의 삶
- 음악과 그림의 상호작용
- 박민규 작가의 해석과 소외된 시선

III. 아름다움의 모순
- ‘가슴이 뛰던 소리’의 반복과 감정의 대비
- 못생긴 여주인공의 부각과 사회적 불편함
- 외모 평가의 폭력성과 인권적 관점

IV. 아름다움의 기준
- 다수와 소수의 역설
- 내면과 외면의 일치에 대한 고찰
- 타인의 시선에 매몰된 삶의 구조

V. 아름다움의 정의
- ‘아람답다’의 어원적 해석
- 에리히 프롬의 자아 인식과 타자 이해
- 미디어와 비교의 함정
- 자기 기준의 설정과 삶의 주체성

VI. 상상력의 해석
- 사랑의 본질과 사회적 편견
- 여주인공의 선택과 남주인공의 연민
- 사랑의 품사 변화와 시적 표현
- 작가의 결말 선택에 대한 아쉬움과 메시지

VII. 행복에 이르는 길
- 예술을 통한 치유와 자아 발견
- 편견과 싸우는 예술적 반항
- 반복되는 깨어짐과 반향의 의미
- 자기 사랑과 상상력의 확장



♧ 참고도서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위즈덤하우스, 2009.07.20. >

1) 12-13p

2) 13p

3) 174-175p

4) 164p

5) 156p

6) 281p


& 언젠가부터 TV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되었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주인공들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PPL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줄거리가 탄탄하더라도 여주인공의 외모가 그 이야기를 받쳐주지 않으면, 이상하게도 내 관심은 멀어졌다.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으며, 나는 그 불편함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장 못생긴 ‘시녀’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야기 자체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못생기다’라는 형용사, 그 단어는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왜 나는 그 단어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못생기다’는 말은 외모에 대한 평가를 넘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판단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남자에게는 생긴 걸로 낮잡아보는 경향이 있었고, 여자라면 애초에 관심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만약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졌다면 ‘생각보다 의외’라고 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생긴 대로 논다’고 단정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불편함은 단순히 단어 하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품고 살아온 시선의 문제였다는 것을. 외모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해온 내 습관, 그리고 그 기준이 내 감정과 관계, 심지어 가치 판단까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박민규는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반복한다. 그것은 문학적 장치이자, 독자에게 던지는 도발이다. 그는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나는 그동안 외모가 뛰어난 사람에게 끌렸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관심했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사회가 나에게 주입한 기준이기도 했다. 박민규는 그 기준을 뒤흔든다. 그는 가장 소외된 인물을 이야기의 중심에 세우고, 그를 통해 사랑과 인간성, 그리고 아름다움의 본질을 묻는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불편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못생기다’라는 단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단어가 내 안에 있던 양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오는 ‘부름’이라고 말했고, 그것은 외부의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에 대한 내면의 호출로서, 단순한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을 규정하고 배제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 불편함은 곧 질문이 되었다. 지금껏 아름답다고 여긴 것들은 정말 아름다웠던가. 혹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 것들은 정말 그렇지 않았던가. 그 기준은 누구의 것이었고, 나는 왜 그 기준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가.


박민규는 그 기준을 정면으로 부순다. 그리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방식에 있다.”


그렇다. 사랑은 외모나 조건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아름다움은 타인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되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게 되 므로, 그 사랑은 사람과 사람을 엮어내는 힘이 되는 것이다.


양심은 우리가 ‘세인’들의 익명적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제 나는 ‘아름다움’의 방식으로 사랑을 다시 정의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당신을 그리고 싶지만
나는 한 줄의 선도 그을 수 없네요.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는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이 앞에 있다면
나는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이 없는 날은
아주 먼 미래 같고,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면 되죠.

나는,

이 환상 속에
계속 머물고 싶어요.

당신이 떠오르면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빨간 태양을 바라보겠어요.

“오늘, 나는 그녀를 만난다.”

그렇게 외치면
더 바랄 건 없어요.

그러면
모든 것이
희망 속에
잠길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실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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