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앙드레 지드
* 나는 애써 들어가야 할 그 좁은 문을 보았다. 내가 잠겨 있던 꿈 속에서 나는 그 문을 흡사 일종의 금속 압연기처럼 상상하고는 그 속으로 힘써 들어갔다. 그러자 그 문은 다시 알리사를 찾아가던 바로 그 방문이 되었다.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무(無)로 돌리고, 내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이기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좁기 때문이니라." 보티에 목사는 계속했다. 5)
책을 살 때,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읽을만한 책들을 고르려고 하는 편이고, 읽을수록 해석이 풍부해지는 책을 사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반면에 트렌디한 책들은 주로 도서관에서 대여하거나 '밀리의 서재'같은 보이스북으로 출근길이나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짬짬이 읽고 있다.
고전의 틀 위에 현상적인 것들을 대입해 보면 인간의 삶은 어떠한 경계선 위에 맞닿아있고 상황이 괜찮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범주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어떠한 계기는 트리거가 되어 범주 그 자체를 붕괴시켜 버리고 그 토대 위에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진실은 앞으로도 여전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점에 들어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책과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가끔은 그립던 것들에 대한 어떤 생각들이 잔잔히 떠오르기도 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 같은 것을 읽고 또 읽곤 했었다. 그러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알게 되었고,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면, 그 단어는 어떤 의미가 응축된 '메타포'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게 아니라 틀을 유지하면서도 보는 위치에 따라 해석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소설이 암시하는 주제와 상관없이도, 어떠한 것의 '가능태'가 될 것이다.
초유의 계엄사건을 겪고 있는 현시점에서 '좁은 문'이라는 '화두'는 의미심장하게도 느껴진다.
이 순간이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 지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서는 그 순간을 회상할 수 없다. 1)
소설의 주인공인 제롬은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자기 외숙모인 '뤼실'을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이미지로 묘사하지만 그녀에게서 ‘까닭 모를 어색한 감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느낌’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반면, 뤼실의 딸인 알리사에게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알리사는 ,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뤼실을 목격하게 되면서 커다란 상처를 받게 되고, 신앙의 힘으로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모든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한다. 그런 알리사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던 제롬은 그 곁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두 사람을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보던, 알리사의 동생, ‘줄리에트’는 어느 순간부터 제롬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의 언니에게 강한 질투심을 품기도 했다.
그녀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은 다만 물음이며 또 기다림이었다...... 2)
알리사는 제롬과의 미래를 꿈꾸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지은 죄를 대속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기에 동생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두 사람이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앙에만 의지하여 그것을 단순히 억누르려고만 했다.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 제롬에게 체념한 줄리에트는 포기하듯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서두른다. 줄리에트의 결혼으로 표면적으로 둘 사이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없어진 것 같았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벽은 여전히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알리사는 차츰 회복되어 가는 동생에게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질시감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줄리에트가 제롬과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혔고, 순탄하게 결혼생활을 하는 모습에 심한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제롬은 알리사가 겪고 있는 내면의 갈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할 것을 재촉하기만 했다.
그렇게 같은 길을 걸어간다고 믿어왔던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벌써부터 내 결심을 시련에 부대끼게 하고 싶었고, 당장에 그녀 곁을 떠나서 한결 그녀에게 값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3)
알리사와 제롬은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었을 때는 차분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지만, 막상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게 될 때면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었고, 오히려 다른 관계 속에 몰두하여 정신없이 지낼 때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제롬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으나 알리사는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나타나는 어머니의 흔적들을 용납할 수 없었고, 그러한 감정의 동요에 괴로워하기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헤어지는 것이 그를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한 결심 뒤에 깔린 진심은, 부치지 못한 편지 속에 여전히 남아있었고, 그것을 차마 태우지 못한 채 멀리 떠나버린다.
책을 읽었던 많은 독자는 줄리에트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 현실적이라고 평가하곤 하는데, 솔직한 감정표현으로 인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을 이별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그녀는 결혼을 통해,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들을 해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결정 역시, 숨겨져 있는 것들을 억누르고 자신을 유리한 위치에 올려놓기 위한 '방어기제'에 불과했을 뿐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으니라. 4)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뮈리엘' 가정이 파탄 나게 된 것은 뤼실의 잘못이 크다고 이해했었지만, 그녀 또한 나름의 '좁은 문'을 걷고 있었다.
뤼실은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살다가 자녀가 없는 경건한 개신교 목사 부부에게 입양되면서 엄숙한 집안의 분위기에 눌려 살았고,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떠밀리는 것처럼 뮈리엘과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았다.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결혼한 여성들에게 수동적인 역할만을 요구했고, 그것은 청교도적인 가풍과 맞물러 심리적으로 더욱 위축시켰을 것이다. 결국, 그러한 억압은 발작과 일탈과 같은 '스트레스'로 나타났고, 가족들에서도 외면당한 채, 그녀는 존재자체를 부정당했다
어떤 측면에서 뤼실의 죄목은 자신의 마음과 욕구에 솔직했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습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뤼실에게는 자기 삶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소설은 카뮈의 '이방인'과도 어느 정도의 접점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의적이든 타의건, 그들은 결국 사회적 압력에 의해 축출당했다. 하지만 아주 잠시일지라도,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것에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리사와의 추억을 붙들고 남은 생을 살고자 하는 제롬의 모습을 보면서 줄리에트에게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그치고, 제롬에게'이제는 잠에서 깨야할 때'라고 말하며, 소설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면서 끝을 맺는다.
태양은 비할 데 없이 맑은 하늘에서 저물어갔다. 5)
나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 그 길이 외롭고 힘들더라도 홀로 걸어갈 것인가? 그런데, 그 길이 내가 추구했던 것과 다른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외부의 시선과 내면의 한계에 봉착해 왔고, 때로는 그것에 순응하기도 하고 저항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면서 얻은 것도 있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고, 누군가는 이제 고생이 끝났는데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는 없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한 가지는, 응축되어 있는 긴장감이 풀리게 되면,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뒤로 밀려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고, 나는 그러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것이다. 그런 약한 모습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루틴을 유지하는 것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책을 읽는 것도, 심지어 운동하는 데에도 의식적인 측면이 무척 강하다.
내가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는지 아직도 잘 가늠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길을 천천히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늙고 지쳐서, 쓰러질 날이 올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날을 맞이하게 될 때,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을 두고, 후회하지 않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좁은 문, 좁은 문, 좁은문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서문: 책을 고르는 기준과 독서의 방식
고전과 트렌디한 책의 선택 기준
해석이 풍부해지는 책의 가치
독서의 방식: 대여 vs 소장
II. 메타포: 고전 속 삶의 은유
『좁은 문』의 상징적 의미
고전과 현실의 접점
메타포로서의 ‘가능태’와 해석의 유동성
III. 감정들: 사랑과 상처의 기억
제롬, 알리사, 줄리에트의 관계
뤼실의 이미지와 알리사의 상처
사랑의 맹세와 감정의 복잡성
IV. 갈등: 신앙과 사랑 사이의 균열
알리사의 내면적 갈등
줄리에트의 질투와 체념
제롬의 무지와 관계의 균열
V. 거리감: 가까움이 불러온 답답함
심리적 거리와 관계의 밀도
제롬과 알리사의 엇갈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려는 알리사의 선택
VI. 좁은 문: 시대적 억압과 여성의 존재
뤼실의 삶과 청교도적 억압
죄와 욕망 사이의 경계
『이방인』과의 연결: 사회적 축출과 감정의 진실성
VII. 길: 존재의 방향성과 불안
루틴과 긴장감의 유지
외부 시선과 내면의 한계
죽음 앞에서의 후회 없는 삶에 대한 바람
IX. 결말: 좁은 문을 향한 통과의례
메타포로서의 문과 자기부정
알리사를 향한 마지막 여정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의 의미
♧ 참고도서
< 앙드레 지드, 좁은 문, 문예출판사, 2024.09.10 >
1) 46-47
2) 40p
3) 32p
4) 48p
5) 44-45p
6) 395p
7) 419p
& 어렸을 적, 내가 살던 집으로 가려면 시장 입구에 있는 농협을 지나야 했다. 그 앞에는 늘 노점상들이 있었고, 당시 ‘길보드’라 불리던 불법 복제 테이프들이 진열돼 있었다. 가판대에는 유머집, 퍼즐책, 바둑 교본 같은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중 ‘책’이라 부를 만한 건 추리소설이나 무협지 정도였다.
그런 풍경 속에서 유독 내 눈을 끈 책이 있었다. 제목은 『좁은 문』. 아마도 그 단어에서 연상되는 어떤 메타포가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이, 나는 그 책을 무작정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감상은 단순했다. 두 사람의 이별이 안타깝다는 정도. 이후 몇 번 더 읽었지만, 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읽으면서, 내 관점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알리사의 어머니, 뤼실이 있었다.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지나친 신앙과 도덕관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 변화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은 영향이 컸다. 니체는 우리가 신성하게 여겼던 도덕의 실체가 사실은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라고 말한다. 그 관점으로 다시 『좁은 문』을 읽자, 뤼실의 존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억압의 구조를 상징하는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좁은 문』이라는 제목 때문인지, 기존의 감상들은 너무 좁은 틀에 갇혀 있다. 성경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기독교적 신앙관에 따라 해석하거나, 뤼실의 존재를 부정한 채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랑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뤼실을 중심에 두고 읽으면, 해석의 진폭은 커지고 기존의 독해는 뒤집힌다. 남녀 주인공의 처지도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그들의 이별은 단지 개인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가 강요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앙드레 지드 역시 작품 속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 청교도적 엄격함에 염증을 느끼고 가톨릭을 더 인정했다는 점에서, 내 해석이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인간이 욕망을 가지는 것이 잘못인가. 왜 청춘은 아파야만 하는가. 누군가가 길을 막아놓고, 좁은 길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충분히 비판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 구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회피하거나 수긍하며 사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다면, 스스로의 걸음으로 그 길을 걷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고, 페미니스트는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종 원인을 회피하고, 결과만을 근거로 판단하며, 편리한 방식으로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신앙인이자 인권옹호자이며, 성경 구절의 온전한 해석과 소외된 인격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알리사와 제롬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지 못하고, 고상한 말투로 포장하려 했으며, 결국 이율배반적인 모습 속에서 상처를 입고 침잠했다. 알리사는 어머니 뤼실을 이해했어야 했고, 제롬은 그런 알리사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오직 그것만이 좁은 길을 걸어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전이나 철학을 읽을 때, 그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 한다. 그 범주를 벗어나면 오답이라 말하고, 오독이라 단정한다. 하지만 그런 태도야말로 작품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구속하고 확장성을 막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이나 진리를 어설픈 지식으로 환원해 소유하려 할 뿐이다. 결국 그들도 뮈리엘 일족이나 도덕주의자들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수나 현자들은 그 틀에서 벗어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걷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 길은 ‘너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 독일인의 사랑 >
어머니 품 안에서 처음 별을 보았을 때처럼,
그 추억들은 어스름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나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데, 나는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는데, 나는
이름 없는 슬픔에 가슴 아려오는데, 나는
그녀의 전부를, 나의 모든 것을
감춰진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
내게 어딜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녀는 내 존재도 모를 것이다.
저녁노을처럼 말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한 번이라도 빛을 보고 나서 눈이 멀었으면,
내게는 그럴만한 조건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바라건대 그대의 오라비가 되던,
바라건대 그대의 아버지가 되던,
그저 이웃 사람의 인연이라 할지라도,
그대를 보고, 목소리 들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대만을 위해, 무엇이든 되고 싶다.
"자!"
이윽고 그녀는 말했다."이젠 잠에서 깨지 않으면 안 돼요......"
나는 그녀가 일어서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기력이 없는 듯이 옆 의자에 쓰러지는 걸 보았다.
그녀는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갔고 울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하녀가 등불을 가지고 들어왔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