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사양, #다자이 오사무, #휘청거리는오후, #박완서
*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1)
나는 보통 독서를 할 때 두 권 정도의 책을 주변에 펼쳐놓고, 한 권을 읽다가 약간 지루해지면 다른 책으로 자연스럽게 눈을 돌리는 습관이 있다. 그렇게 책을 번갈아 읽다 보면, 서로 낯설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의외로 잘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양귀자의 『모순』과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읽을 때가 바로 그랬다.
두 작품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모순』은 여성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시선을 통해 여성을 그려낸 반면, 『사양』은 남성 작가가 여성의 내면을 빌려 서술한 작품이다.
『모순』은 IMF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 사회를, 『사양』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몰락한 일본 귀족 계급과 붕괴된 가치 체계를 배경으로 한다. 각각 한국과 일본의 격변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넘나드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두 작품은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여성의 내면을 깊이 있게 반영하고 있다.
필자는 이 두 작품의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그들이 살아낸 시대와 감정의 결을 통해 여성의 삶과 자의식을 표현해보고자 한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안진진 2)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은 가난의 인생역정을 경험한 소위 말하는 '애어른'이다. 그녀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촌들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어도 부모를 원망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품은 '모순'을 모티브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일단 '안진진' 이름부터 모순적인 의미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참될 眞이 2개나 들어가지만, 성이 안 씨이기 때문에, 진지하지 않다는 해석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일란성쌍둥이 중 언니로 태어나 현실적이고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가지만, 이모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반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정반대의 성향을, 이모부는 계획적이고 철저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안진진의 동생은 아버지를, 사촌들은 이모부를 닮았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가족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받아들이지만, 강한 개성들은 그들을 부딪치게 만들고 함께 어우러지지 못하게 한다. 오직 주인공만이 삶의 모순적인 속성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의도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려고 한다. 작가는 현시대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전근대적인 모습으로 '모순'을 그려냈지만, 어쩌면 주인공의 결혼을 통해 그러한 갈등들을 수렴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제 도덕 혁명의 완성이랍니다. -카즈코 3)
‘모순’과 ‘역설’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모순은 상충되는 두 요소가 동시에 존재해 논리적 충돌을 일으키는 상태를 말하고, 역설은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진리를 품고 있는 표현이다.
'사양'은 카즈코의 시점에서 시작되며, 전후 일본의 몰락한 귀족의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카즈코의 어머니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살아오면서 귀족의 기풍을 지니게 되었으나, 사양(斜陽)이란 단어처럼 새로운 시대에 점점 몰락해 가는 시대의 캐릭터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에 딸인 카즈코는 이름에는 '화목'과 '조화'라는 뜻이 있고, 그녀가 살고 있는 시대적 조류를 거스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생 나오지의 이름에는 '곧게 고친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사회주의를 접한 후, 전근대적인 습성에 벗어나 본질적인 삶을 추구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오히려 신분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나오지는 그러한 모순을 감당하지 못한 채 아편과 술에 찌들어 살다가, 어떤 유부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한편 카즈코는 나오지의 스승이자, '데카당스'적이며 예술적인 삶을 추구하는 우에하라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그녀에게 우에하라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주변의 시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안진진 4)
'모순'은 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주인공은 계속되는 좌절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반해, '사양'의 주인공은 일본 전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다.
안진진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낭만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억척스러운 기질을 가지고 있기도 한 캐릭터였다. 그녀는 현실을 모르는 응석받이나 자기 것만 고집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열심을 다하며 살아가는 여성이기도 했다. 안진진은 능력이 없어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아버지에게 원망보다는 연민을 느꼈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치매는 그러한 노력들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안진진은 보여지는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삶을 마감한 이모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위치 속에 그녀를 밀어 넣고,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모순'속에서 소설은 결말을 맺게 된다.
자신의 행복과 영광이 살아있을 동안에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이 들까? -카즈코 5)
반면 『사양』의 카즈코는 가족의 가난한 삶을 구제해 줄 수 있는 남자의 구혼을 받았지만, 그녀에게는 혼인의 형태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유대감 그 자체가 더 중요했다. 그녀는 사회적 안정이나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본능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받아들인 운명이었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에서 정면을 응시하며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여인의 모델은 바로 화가 자신이다. 당시 여성은 예술 분야에서도 수동적인 피사체로 머물렀지만, 그녀는 주변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가해지는 비난과 고통을 홀로 감내하며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녀가 그린 미인은 당당하게 가슴을 드러내며, 욕망의 주체로서 세상을 마주한다. 뱀처럼 아담을 유혹하고, 자신의 의지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금기를 깨뜨리는 선언이며,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상징적 제스처다. 그녀는 세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품에 안는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실과 이상이 일치하는 결혼생활을 꿈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거의 일어나기 힘들며, 일어나더라도 이상향을 반영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완전한 사랑이란 애초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있더라도 아주 잠시동안만 머물 뿐이다. 그리고 운명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가능성으로써, 한번 현실화되고 나면 되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양귀자의 관점에서는 카즈코는 혹독한 현실에 마주한 후, 좌절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삶을 살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고, 그것은 계속해서 콤플렉스를 자극할 것이며,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자이 오사무의 관점에서 안진진은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처럼, 보이는 삶을 연출하다 자신을 잃게 될 확률이 높고, 부인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투영한 채로 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양귀자는 이상에 부딪치는 현실을,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는 현실에 부딪치는 이상을 각각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양귀자의 문장은 현실을 닮았다. 절제되어 있고, 감정은 눌려 있다. 안진진은 말보다 행동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자신의 삶을 설명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낸다. 문장은 단단하고 감정은 조용히 스며들며, 그녀의 세계는 설명보다 체험에 가깝다. 그 체험은 현실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그만큼 감정은 가라앉는다. 그래서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모순』에서 낭만적 사랑은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며, 결혼은 현실적 타협의 장으로 기능한다. 이는 당시 젊은 여성들에게 결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반면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은 감정의 파편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카즈코는 자신의 내면을 숨기지 않고, 그것을 문장의 표면까지 끌어올린다. 그녀의 감정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며, 적극적인 의지로 표출된다. 독자는 그 진폭을 직접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양』의 출간 이후, 일본에서는 ‘사양족(斜陽族)’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로 인해 『사양』은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도 해석되며, 일본 여성 문학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양귀자는 현실을 통해 인물을 드러내고, 다자이는 감정을 통해 인물을 구축한다. 하나는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장소적 배경을 넘어,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라는 성별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이상적인 여성성에 대한 해석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양귀자는 현실을 견디는 여성의 내면을 조용히 그려내며, 다자이는 감정을 통해 삶을 돌파하려는 여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비교는 이상적인 남성성에 대해서도 확장해 볼 수 있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가 남성 인물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그들이 추구하는 남성성의 이상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문학적 성찰의 폭을 넓히는 유의미한 접근이 될 것이다. 성별에 따라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상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리고 그것은 시대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다.
이 두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여성의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하려는 문학적 태도이며, 독자는 그 결을 따라가며 사랑과 삶, 자의식의 다양한 결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자유를 바라고, 사랑을 통해 도약하기를 꿈꾸지만, 주어진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의 조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떤 것이 우위에 있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이미 어떤 가능성이 현실화된 후에 깨닫게 된 것일 확률이 높다.
만약 진정한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완전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부터 시작되며,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추론된 의미들이, 어느 정도 주변의 동의를 얻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왠지 이러한 감정에 어떠한 정의를 내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시도처럼 여겨진다.
『모순과 역설, 아니면 그 언저리에서』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서문: 독서의 방식과 만남
독서 습관 소개 (두 권을 번갈아 읽는 방식)
『모순』과 『사양』의 만남이 만들어낸 문학적 대조와 공감
II. 시대적 배경과 여성의 내면
『모순』: IMF 이후 한국 사회, 현실을 견디는 여성
『사양』: 전후 일본, 몰락한 귀족과 감정을 돌파하는 여성
시대의 격변과 여성 주체성의 형성
III. 모순과 역설: 개념적 탐구
‘모순’과 ‘역설’의 철학적 차이
안진진과 카즈코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개념의 실체
인물 이름과 가족 구조에 담긴 상징성
IV. 운명과 의지: 삶의 태도 비교
안진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살아가는 여성상
카즈코: 감정을 따라 운명을 개척하려는 여성상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와 여성 주체성의 예술적 상징
V. 사랑의 변증법: 인물 간 대화 형식
안진진과 카즈코의 대화로 구성된 사랑에 대한 철학적 논의
현실과 이상, 감정과 생존 사이의 균형
VI. 문체와 여성성의 표현 방식
양귀자: 절제된 문장, 체험 중심의 서술
다자이 오사무: 감정의 진폭, 내면의 표출
문체를 통해 드러나는 이상적인 여성성의 차이
VII. 확장적 성찰: 남성성에 대한 문학적 상상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가 그려낸 남성상은 어떻게 다른가
성별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상에 대한 상상
VIII. 현실과 이상 사이… 사랑
사랑의 정의는 가능한가?
감정의 반복과 현실화된 가능성
♧ 참고도서
<모순, 양귀자, 쓰다, 2013.04.>
1) 296p
2) 22p
4) 296p
<사양, 다자이 오사무, 창비, 2015,07 >
3) 812p
5) 663p
6) 812p
& 도서관에서 웬만하면 대출하기 어려운 책 중 하나를 꼽자면, 나는 양귀자의 『모순』을 떠올린다. 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에게 ‘인생책’으로 회자된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 작품은 갈등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그것은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일 것이다.
『모순』의 안진진은 사랑과 현실, 자아와 가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이러한 모순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단순히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구속’이라는 양극적 가치가 충돌하고 대립하는 문제로 수렴된다. 결국 안진진은 그 선택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 또 잃게 될 것이라는 진실을 수용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결정을 단순히 ‘생존’의 문제로 한정 짓기보다, ‘성장’의 서사로 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반면,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속 가즈코는 사랑 없는 결혼과 겉치레를 억압으로 받아들이며, 도덕이나 관습조차 사랑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주어진 조건을 긍정함으로써 삶을 재창조하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녀를 니체적인 인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처럼 대조적인 두 인물의 구조 속에서 흥미로운 상징들이 드러난다. 안진진은 가즈코의 동생 나오지의 결말을 연상시키며, 가즈코는 오히려 진진의 어머니처럼 강인한 삶을 살아갈 것 같다. 이 두 인물은 삶과 죽음, 주체성과 수동성의 은유적 대비로도 읽힐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도 반복된다. 세 딸—초희, 우희, 말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결혼을 선택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매몰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가장인 아버지 허성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초희는 부유한 남성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지만, 자신의 본질적 욕구와 부합하지 않는 결혼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외도를 하고, 결국 약물에까지 손을 대며 무너진다.
우희는 낭만적 사랑을 선택했지만, 가부장적 가치관에 사로잡힌 남편과 시댁의 억압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말희는 조건과 사랑을 모두 갖춘 결혼을 했지만, 아버지 허성은 부유한 시댁에 걸맞은 혼수를 준비하려다 평생 지켜온 ‘신뢰’를 저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서사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양귀자의 『모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에 등장하는 세 어머니는 각기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지만, 소설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로 기능한다.
『모순』의 안진진 어머니는 시장에서 내복을 팔며 가족을 부양하는 현실적인 여성이다. 감정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며, 딸에게도 감정적 위로보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건넨다. 진진은 그런 어머니를 답답하게 느끼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안에 담긴 강인함과 희생을 이해하게 된다. 그녀는 모순된 현실을 껴안고 살아가는 여성이면서도, 체념을 넘어선 삶의 저항 방식을 보여준다.
『사양』의 가즈코 어머니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품위를 끝까지 지키려는 인물이다. 전쟁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현실 속에서도 격조와 체면을 유지하려 애쓴다. 아들의 방탕과 딸의 사랑, 그리고 가족의 몰락을 지켜보면서도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침묵은 무력함이자, 동시에 품위의 마지막 방어선이다. 결국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며, 몰락 서사의 상징으로 퇴장한다. 이 이미지 또한 『모순』 속 진진의 이모와 겹쳐진다.
『휘청거리는 오후』의 허성의 아내는 조용하고 헌신적인 중산층 어머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체면과 현실을 중시하며, 딸들의 결혼에 있어 물질적 조건을 우선시한다. 남편 허성이 교육자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려 할 때, 그녀는 그런 이상보다 안정과 체면을 택한다. 그 결과 허성은 점점 고립되고, 결국 가족 안에서조차 자신의 존재가 무가치하다는 절망감에 빠진다. 그녀는 남편에게 “혼수는 여자의 자존심”이라며 좋은 물건을 마련하라고 압박했고, 허성은 이를 거절하지 못한 채 도덕적 붕괴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비교될 때 더욱 선명해진다. 『김지영』은 여성의 침묵이 사회 구조에 의해 강요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김지영의 어머니는 자신의 꿈을 접고 자녀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그 침묵은 희생의 상징이다. 반면 『휘청거리는 오후』의 어머니는 가족의 안정을 위해 현실적 선택을 하며, 남편의 이상주의를 무력화시킨다. 그녀의 침묵은 지지의 언어가 아니라, 타협과 무관심의 상징이다.
『김지영』에서는 남성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으며, 여성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반면 『모순』, 『사양』,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는 여성들이 가장의 위치에서 가족을 지탱하고, 남성들은 그 모순 속에서 붕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순』의 안진진 아버지는 낭만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다 가족을 떠난 무책임한 존재이며, 딸에게 감상적인 결혼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든다.
『사양』의 나오지는 ‘평등’과 ‘사랑’이라는 이념적 삶을 추구하지만, 신분에 대한 박탈감과 죄책감,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아편 중독과 방탕 속에서 자살을 택한다. 결국 그는 가장의 모든 의무를 누나에게 떠넘긴다.
『휘청거리는 오후』의 허성은 가족 안에서조차 자신의 존재가 무가치하다는 절망감에 빠지고,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저버리게 되며,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들은 모두 과거의 권위와 현재의 혼란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인물들이다.
결국 이들 작품은 시대의 균열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침묵하며,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은 침묵 속에서 시대를 견디고, 남성은 그 침묵 앞에서 무너진다. 그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 몰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시대의 여성들이 모순을 껴안고 살아가는 동안 남성들이 그 모순 속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들의 몰락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시대의 균열을 드러내는 서사적 장치다.
예전에 이 글을 직장 내부망에 ‘모순과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올렸을 때, 이를 ‘안티페미니즘’의 서사로 이해한 댓글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나는 시대와 상황이 대조적인 여성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 것이지, 그런 반응을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페미니즘을 옹호하지도 않고, 『김지영』에 대한 그분의 반응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 Days >
다투고 헤어졌던 날
여행가방은
1995년 6월 29일,
그날에 머물러 있네.
가방을 가지고 들어왔지만
열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네.
돌아온 그날의 기억
대답 없는 몇 번의 시도
오늘은 나의 생일
행여나 싶은 마음
열리는 황금빛 빗장
환하게 웃는 우리들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다음엔 아무것도 못쓰겠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