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항상,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던
할배ㆍ할매ㆍ아빠ㆍ엄마ㆍ동생
우리 가족이 모여 살았던 그 집
아버지가 흘린 피땀과 눈물이
우리 가족의 삶이, 또 추억들이
기억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 집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이
그 시간이 그리고 그 공간이
가끔씩은 사무치도록 그립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이 너무나...
「그 집」은 한 가족의 삶이 녹아든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기억의 온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항상, 언제나, 그 자리에 /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던”이라는 첫 구절은 영원할 것 같았던 일상의 환상을 깨우며, 독자에게도 자신만의 ‘그 집’을 떠올리게 한다.
“할배ㆍ할매ㆍ아빠ㆍ엄마ㆍ동생”이라는 가족 구성원의 나열은 단순한 호명이 아니라, 세대와 관계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이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갈등, 웃음과 눈물이 얽힌 삶의 무대였다. 그 무대는 이제 사라졌지만, 시인은 그 무대 위에서 펼쳐졌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기억 속에서 되살린다.
“아버지가 흘린 피땀과 눈물이 / 우리 가족의 삶 그리고 추억들이 / 기억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 집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정점이다. 아버지가 지은 집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물리적 노동을 넘어, 가족을 위한 헌신과 사랑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피땀과 눈물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의 흔적이다. 그 흔적은 벽에, 마루에, 창틀에 스며들어 있었고, 이제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이 / 그 시간이 그리고 그 공간이 / 가끔씩은 사무치도록 그립다”라는 마지막 연은 회상의 절정이다. 시인은 그 집을 단순히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이 품고 있던 시간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이 시는 결국, 사라진 집을 통해 사라진 시간과 감정,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그 집」은 공간에 대한 시이지만, 그 공간은 곧 사랑의 기억이 머물던 자리다. 시인은 그 집을 떠올리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사무치도록 그리운 마음 하나를 꺼내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집」은 한 가족의 삶이 녹아든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는 기억의 온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 만덕.
그곳은 구만덕과 신만덕으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 집은 구만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린 시절, 집을 내려다보던 상학봉은 늘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 산 너머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막연한 기대는, 어쩌면 내가 자라며 마주할 인생의 굴곡을 예감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만덕동의 이름은 공민왕 시대의 절, 만덕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만 명의 사람들이 피신한 곳이라는 설이 있다. 만덕터널 근처에는 만덕사지가 있고, 금정산의 병풍사에는 승병들이 왜군과 싸운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 집안이 만덕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슬픔이었다. 아버지가 군 복무 중이던 시절, 막내 삼촌이 대학생 때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다 세상을 떠났고, 그 상실을 이기지 못한 가족은 초량을 떠나 구만덕에 뿌리를 내렸다.
구만덕은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도 동네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잠시 다른 곳에서 살기도 했지만 토지측량 문제로 옆집과 분쟁이 생겨 안방을 부숴야 했고, 결국 아버지는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 옛집을 허물고 3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우리는 작은 아파트에서 넓은 집으로 이사했고, 조부모님은 1층에 살았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할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탔던 분이자 6.25 때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지킨 전쟁 영웅이었다. 화랑무공훈장을 받았지만, 평화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과 도박에 빠져들었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를 붙잡으며 집문서를 지키려 애썼고,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다 매를 맞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었다. 나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도박은 하지 않는다.
내가 여성들을 존중하고 보호하려는 마음도 그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겪은 고통을 보며,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본능이 되었다. 국가가 유공자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했더라면, 할아버지는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그를 외면했고, 문민정부에 이르러서야 뒤늦은 보상이 이루어졌다.
IMF 시절, 아버지가 다니던 대우그룹이 무너졌고,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는 집을 지키기 위해 안경테가 땀에 벗겨질 정도로 일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는 무력감을 느꼈고,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났다. 떳떳한 직장을 갖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도는 모습만 보여드리다, 할머니는 치매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병은 할머니처럼 철두철미한 사람과는 무관하다고 믿었기에, 그 이별은 더욱 충격이었다.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날마다 집을 청소하고 내 방을 정리해주셨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지만, 그것이 할머니가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었다는 걸, 떠나신 후에야 깨달았다.
좋은 일은 간간히 일어나지만, 나쁜 일은 한꺼번에 터진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스트레스로 직장암에 걸리셨다. 다행히 여동생이 다니던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으셨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괴감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상학봉이 떠올랐다. 죽기 전에 그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올라갈 때는 가팔랐지만, 뒤쪽은 완만해서 내려오기는 쉬웠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동네는 재개발되었고, 3대가 살았던 집은 LH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그 건물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새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는 속이 시원했지만, 그 집과 연결 짓지 않으면 그 시절을 떠올리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고향만큼 익숙해진 타향살이에 지쳐갈 때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던
기억 속의 그 집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