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계절이 몇 번이고 또 바뀌어도
오래된 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듯
그대 머물던 온기를 잊지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지나간 추억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귓가를 맴도는 선율에 떠오르는 그날
그대 떠난, 내가 서 있는 그곳엔
우리의 노래만이 남아 있습니다
상처가 아주 많은 사람
상처에 무너지지 않은 사람
상처를 드러내고 나아가는 사람
당신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나는...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습니다
—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마음
「화양연화」는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어도 그 자리를 지키는 오래된 나무처럼, 지나간 온기를 품은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의 고요한 고백이다. 시적 화자는 떠난 그대의 흔적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자리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기억이 머무는 시간의 층위이며, 감정이 고이는 내면의 풍경이다.
“그대 머물던 온기를 잊지 못한 채 /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이 구절은 움직임 없는 기다림이 아니라, 감정을 지키는 방식이다. 시인은 지나간 추억을 손끝으로 어루만지고, 귓가를 맴도는 선율에 따라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독자는 그 여백 속에서 자신만의 기억을 불러올 수 있다.
“그대 떠난, 내가 서 있는 그곳엔 / 우리의 노래만이 남아 있습니다”
노래는 말하지 못한 감정의 흔적이다. 그것은 둘이 함께했던 시간의 증거이며, 지금은 혼자 남겨진 자의 위로다. 시인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공간과 음악, 침묵과 반복을 통해 감정을 전한다.
시의 후반부는 상처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상처가 아주 많은 사람 / 상처에 무너지지 않은 사람 / 상처를 드러내고 나아가는 사람”
이 세 줄은 상처를 바라보는 태도의 진화를 보여준다. 시적 화자는 단순히 아픈 사람이 아니라, 그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삶은 완벽하지 않지만,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 말은 체념이 아니라, 조용한 의지의 선언이다.
「화양연화」는 찬란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찬란함이 지나간 뒤에도 그 자리에 머무는 마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시인은 묻지 않는다. 대신, 기억을 꺼내고, 상처를 드러내며, 살아간다. 그 고요한 반복 속에서 독자는 자신만의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된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그렇게 불릴 수 있다.”
& 문장을 받아 적다 보면, 가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구절이 어떤 연상이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기억이나 감정을 불쑥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 헤르만 헤세의 『죽은 나무를 위한 애도』를 읽으며 문장을 정리하던 중, 문득 영화 『화양연화』가 떠올랐다. 두 작품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다. 굳이 찾자면, 둘 다 ‘나무’ 혹은 ‘식물’이 등장한다는 점 정도일까. 특히 영화 속 앙코르와트를 뒤덮은 초록빛 담쟁이덩굴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책에서 옮긴 문장은 이렇다.
“상처가 아주 많은 사람 / 상처에 무너지지 않은 사람 / 상처를 드러내고 나아가는 사람.”
나는 이 구절에서 ‘상처’라는 단어에 붙들렸다. 그리고 그 단어는 곧장 『화양연화』의 인물들을 떠올리게 했다. 남자 주인공은 담쟁이덩굴로 덮인 벽 틈에 자신의 감정을 묻는다. 상처와 함께, 마음까지 묻어버리는 그 장면은 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신문사 편집장 주모운(양조위)과 무역회사 비서 소려진(장만옥)은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충격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의 결을 공유하게 되지만, 그들을 배신한 이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기에 끝내 선을 넘지 못한다.
처음에는 영화의 스토리에만 집중했지만, “Yumeji’s Theme”라는 음악이 흐를 때마다 점점 더 복잡한 심경 속에서 갈등하는 주인공들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히 전해졌다. 느리게 흐르는 왈츠 리듬과 애처로운 선율은 닿을 듯 닿지 못하는 두 사람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그들의 감정이 머물렀던 공간에는 이제 자취만이 남고, 나는 그 장면에서 신영옥이 부른 ‘시크릿 가든’의 “그대 떠난 텅 빈 정원엔 우리의 노래만 남아 있어요”라는 가사가 떠올랐다.
기억은 또 다른 장면을 불러왔다. 아주 오래전, 하다 히데노리의 『겨울이야기』라는 만화에서, 여자 주인공이 사귀는 중에도 전 남자친구를 위로한다며 관계를 맺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단지 외부의 도덕적 잣대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속여야만 한다면—그렇게 따르는 것을 과연 ‘선’이라 부를 수 있을까?”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 『외출』도 있다. 그 영화 역시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어떤 감정은 품고, 어떤 감정은 억눌러야 한다고 믿는가?
우리나라에서는 ‘간통죄’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명분밖에 남지 않은 도덕주의는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얼마 전 이선균은 공인이라는 이유로 풍속업소에 다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온갖 비난을 받았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잣대가 훨씬 더 공인인 정치인이나 재력가들에게는 예외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법은 종종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배적 가치관과 권력 구조를 반영한다. 대한민국은 풍속업소의 영업을 허용하면서도 성매매특별법으로 단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서구사회에서 서민들은 기독교 윤리에 지배당했지만 왕과 귀족들은 예외였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엄격한 관습과 윤리가 부여되었고, 양반 계급들은 자유로이 첩을 거느리고 기생집을 드나들었다. 조선 중기 이후 유교화되면서 여성에게만 정절 의무가 강조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나는 단순히 불륜을 옹호하거나 성매매를 합법화하자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의 욕망은 허용되고, 누구의 욕망은 처벌받는가?”
니체에 따르면, 권력자들은 도덕적 잣대를 세워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자신은 그 기준에서 예외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어떤 이들은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울 수 있으며, 풍속업소가 여전히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욕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욕망에 접근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즉 ‘권력의 불균형’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영화 속에서도 반복된다.
욕망을 실행한 자는 사라지고, 감정은 감당한 자에게만 남는다. 한쪽은 당당히 불륜을 저지르고, 다른 한쪽은 상처와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늘 그렇듯—감정의 무게를 끝내 짊어진 채 한발 물러서는 이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인 자(장만옥)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입장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
나는 사랑과 욕망에 대해 개인이 솔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외부의 기준이나 사회적 시선 때문에 그 마음을 억누르고 살아간다면,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비난과 책임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그런 이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에게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예수가 말했듯,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그렇지 않다면, 타인을 심판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태도일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두 사람의 안타까운 마음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엔딩에 나오는 담쟁이덩굴만이 그 감정을 아무 말 없이 덮어주는 듯하다.
한때,
말하지 못한 사랑이 있었고
지나쳐야 했던 마음이 있었다.
삶의 찬란한 순간이 지나갔지만,
한 번쯤은 ‘화양연화’가 있었기에—
우리는 여전히, 삶에서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