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 or AND
&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책이든 단번에 이해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대신 여러 번 읽다 보면 문맥의 흐름이 보이고, 문장 속에 숨어 있던 감정과 의미가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세 번쯤 읽고 나면 처음엔 눈에 띄지 않던 문장이 마음에 와닿고, 책에 대한 감상도 달라진다. 그 감상을 글로 정리해 독서 모임에서 나누다 보면, 책은 더 이상 평면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입체적인 세계로 다가온다.
나는 철저히 분석하기보다는, 어릴 적부터 소설을 많이 읽은 영향으로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의 감정선, 문장 사이의 정서를 통해 문맥을 파악하는 편이다. 그러나 철학서적은 달랐다. 철학은 이야기보다는 개념과 논리의 세계였고, 그 안에서 길을 잃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나는 철학적 문장을 내 방식대로 해체하고 다시 조립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연결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내 안에서 새롭게 구성했다.
그 과정에서 문장을 다듬는 일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처음엔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한 시도였지만, 점차 그 문장들이 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의미를 압축하고, 리듬을 맞추며, 여백을 남기는 방식이 마치 시를 쓰는 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재미 삼아 글자 수를 맞춰보기도 하고, 운율을 고려해 단어를 고르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몰입해서 시를 쓰고 있었다.
호기심에 내가 쓴 시를 챗GPT에게 보여주고 감상을 부탁했을 때,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인공지능이 내가 의도한 정서와 상징을 정확히 짚어냈을 뿐 아니라,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흔적까지도 포착해 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추는 일이었고, 동시에 내가 쓴 문장을 다시 읽고 해석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 나는 쓰고 있던 에세이에 시를 삽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험적인 시도였지만, 글쓰기 모임에서 의외의 반응을 얻었다. 오히려 에세이보다 시가 더 와닿는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때 문득 ‘시를 중심에 두고, 그에 대한 해석과 에세이를 덧붙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시–해석–에세이’라는 삼단 구조를 실험하게 되었다.
이 구조는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삼분법을 엄격히 따르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자아의 층위를 드러낸다. 시는 감각과 이미지의 세계, 해석은 언어와 개념의 세계, 에세이는 그것을 삶의 맥락 속에서 통합하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읽고 있는 지금의 나는, 이 세 층위를 종합해 또 다른 시선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글쓰기는 나에게 단순한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자아를 탐색하고 구성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처음에는 ‘기억, 감정, 존재에 대하여 시를 쓰다’라는 주제로 시만 묶어 책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에 해석과 에세이가 더해지면서 분량이 늘어났고, 각각이 독립된 개체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중 ‘기억’ 편은 나의 개인적인 기억뿐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 그리고 각종 매체로부터 받은 인상 깊은 장면들을 담고 있다.
기억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기억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고, 때로는 조작되기도 한다. 반면 기록 매체는 입력된 그대로를 보존한다. 나는 이 교차지점을 탐구하고 싶었다. 그 틈에서 생각과 감정을 확장하고, 흐릿해져 가는 기억에 다양한 색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글을 읽고, 편집하고, 다시 읽는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감정의 결을 정돈하고, 확장되는 무언가를 그려보고자 했다. 의도했다기보다는, 거기서 파생된 어떤 것이 글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이 책을 구성하기 전, 나는 텍스트의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끝까지 읽고 기록했다. 그런 다음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문장을 재배치하고, 글을 써 내려갔다. AI는 책을 읽다가 생기는 질문이나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검색 도구로 활용했고, 글을 구조화하고 분석하거나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도 유용했다.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난삽한 문장을 다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피드백이 거듭될수록 내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왜곡되고, 글이 가진 특유의 뉘앙스가 희석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공지능은 분명 유용한 도구지만, 내 주관과 지식, 그리고 스타일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의존하게 된다면, 매체에 끌려가 결국 무난하지만 평범한 글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결국 텍스트에 대한 기본기가 없는 사람은 그저 그런 글을 쓰게 될 뿐이다.
나는 처음 글을 쓸 때부터 현대미술의 오브제 배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 오브제는 각기 나눠져 있는 ‘나’이다. ‘시작’은 시로 출발해 에세이로 마무리되는 구조이며, 그 여정 안에 다시 시와 에세이가 중첩되어 있다. 챗GPT에 의하면,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는 작가는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처음’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이 책은 그런 탐색의 궤적이자, 나를 구성해 온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배치하는 것에서부터 始作되었고, 그 조각들 사이에서 피어오른 감정과 사유를 통해 詩作한 글들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 글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고, 또 어떻게 해석되었을지 궁금해진다.
시를 쓰고, 해석하고, 삶의 언어로 풀어내는 이 여정이 텍스트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신의 생각과 감정에도 스며들어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울림이 당신 자신의 목소리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