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철학의 근본물음, #하이데거
*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여라."
<창세기> 1장 28절.
철학은 본래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지혜를 지적 우월성으로, 사랑을 소유의 욕망으로 오해한다. 이러한 개념의 왜곡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고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철학은 이 왜곡된 인식의 틀을 깨고, 다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이 오랫동안 ‘존재자’에만 집중하고 ‘존재’ 자체를 묻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존재자는 우리가 보고, 만지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구체적인 것들이다. 반면 ‘존재’는 그러한 존재자들이 ‘있을 수 있게 하는 방식’, 즉 그 배후의 조건이다. 그는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열리는 가능성의 장으로 이해했다. 철학은 이미 주어진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묻는 태도다.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철학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철학의 물음을 던질 만한 낯섦을 품고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구약의 시대는 끝났고, 사랑과 평화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믿는가? 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한다. 구약과 신약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충돌하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약육강식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며, 힘이 정의가 되고, 약자는 소비된다. 우리는 진보와 윤리를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구조화된 폭력이 작동하고 있다.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윤리적 소비나 동물권을 주장하는 환경주의자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책을 펼쳐보니 저자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축산과 도축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며, 구조화된 폭력의 실체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책을 읽으며 인간 역시 동물들이 겪는 패턴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들이 좁은 공간에 갇혀 착취당하고 도태되듯, 인간도 제도와 규범 속에서 억압받고 기능화된다. 우리는 교육이 인간을 키워내기 위한 것이라 믿지만, 그것은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실상은 소수의 편의에 맞춰 설계된 커리큘럼이며, ‘공교육’이라는 포장 아래 다수는 순응과 복종을 학습한다.
이런 구조가 진리라 여겨지는 현실은 씁쓸하게 여겨진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당연한 것’에 길들여졌고, 그 당연함이 사실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설계였다는 사실조차 의심하지 않는다. 진리라 믿어온 것들이, 어쩌면 가장 교묘한 폭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기존 철학이 개념에 갇혀 편향된 해석에 머물렀다고 보고, 철학은 다시 ‘있음’ 자체를 묻는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열어놓고, 그 가능성의 장 속에서 물음을 던지며, 존재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나가야 한다.
그는 철학이 가장 순수하고 맑은 상태로 머물 때, 그것은 최고의 기운 속에 머무르는 것이라 했다. 그 맑은 상태는 공허가 아니라, 존재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 앞에서 열린 기운이다. 우리는 그 기운을 놀라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오는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악, 그리고 모든 존재자 앞에서 존재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우리가 익숙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에 찾아온다.
산란계 수평아리에게 매몰 처분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쓰레기차 여러분이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를 수거해 매립지에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규칙적이고 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병아리들에겐 방송사의 카메라가 찾아가는 일도 없고, 어떠한 경악도 우려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 병아리들도 똑같이 비명을 지르고 살려고 발버둥 치지만 말이다.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은 연민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1)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는 철학의 존재 망각을 깨우는 강력한 텍스트다. 그는 축산과 도축의 현장에서 직접 일하며, 동물들이 어떻게 사육되고 도태되는지를 기록한다. 닭, 돼지, 개는 생명을 가진 존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적에 따라 ‘고기’로 대상화된다. 수평아리가 분쇄기에 들어가고, 살이 찌지 않는 돼지가 바닥에 내던져지는 장면은 우리가 외면해 온 고통을 직시하게 만든다.
산란계 수평아리의 매몰 처분은 마치 쓰레기 수거처럼 반복된다. 그 반복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무감각을 제도화하고, 고통을 일상 속에서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병아리들은 비명을 지르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상품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연민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수평아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쓸모없음’이라는 낙인을 부여받는다. 이 낙인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기준에서 비롯되며, 그 기준은 생명을 평가하고 도태시키는 권력으로 기능한다. 말할 수 없는 존재자들은 이 구조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우리는 그 사라짐 앞에서 ‘존재의 침묵’만을 마주하게 된다.
이 침묵은 단지 동물의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만든 기준이 생명을 기능으로 환원하고, 기능을 수치로 측정하는 방식 자체를 드러낸다.
도축장의 풍경은 단순한 산업 현장이 아니라, 생명을 분류하고 처리하는 구조적 장치다. 사육, 평가, 도태—이 반복되는 리듬은 인간 사회의 작동 방식과 닮아 있다. 축산업 종사자는 그 구조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생명을 다루지만 실질적으로는 고기를 생산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대상이 한때 생명이 깃들었던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 무감각은 구조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닭은 마리 수로 거래되고, 돼지는 무게로 환산된다. 개는 인간과 감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이지만, 식용 산업에서는 역시 무게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진다. 감정적 연결은 무시되고, 개 역시 근 단위로 환산되는 물건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개를 다루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이며, 감정은 상품화되거나 혐오의 대상으로 기능화된다.
철학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때때로 드러나기도 숨겨지기도 하는 그 자신의 유일한 그 자신의 본질입니다.
<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물음』, p.21 >
수평아리의 매몰 처분 앞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단지 동물의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구조가 생명을 기능으로 환원하고, 그 기능을 수치로 측정하며, 그 수치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방식 자체다. 이 구조는 너무도 익숙하게 작동하여,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을 지우고, 존재를 침묵시키는 데 익숙해진다.
철학은 바로 그 침묵 앞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존재가 사라지는 자리, 구조가 고통을 덮는 자리, 상품 가치가 연민의 기준이 되는 자리에서 철학은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 물음은 이미 주어진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묻는 태도다. 철학은 존재의 침묵에 귀 기울이고, 그 침묵 속에서 드러나기도 숨겨지기도 하는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가 철학을 필요로 하는 순간은,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병아리의 비명 앞에서, 도축장의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인간이 수치로 환산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익숙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흔들린다. 철학은 그 흔들림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언제나 존재의 본질을 향한 물음이며, 그것은 외부의 잣대나 성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열어 보이는 그 본질의 움직임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꼬리나 이빨 자르기는 돼지를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고 항변해 볼 여지가 조금은 있지만 거세는 오직 고기의 맛을 좋게 하려고 실시한다. 2)
동물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그 고통을 다루는 사람에게도 무관심하다. 생명을 다루는 자는 생명을 소비하는 자에게 평가받고, 그들 사이에도 갑을 관계가 작동한다. 이 구조는 인간 사회에서도 반복된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관계는 그 대표적인 예다. 외국인은 ‘임시적 존재’로 기능화되고, 한국인은 ‘기준적 존재’로 자리 잡는다. 외국인은 노동의 단위로 존재하며, 한국인은 그 단위를 관리하거나 경쟁하는 위치에 놓인다.
갈등은 기능의 언어로 번역된다. “너는 더 싸게 일한다”, “너는 내 자리를 위협한다”, “너는 기준을 흔든다.” 그러나 이 갈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가 만들어낸 긴장이다. 기능화된 존재들이 서로를 기준으로 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갈등이며, 그 갈등은 생존의 언어로 위장된 통제의 장치다. 이때 ‘기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와 자본이 설정한 효율의 언어이며, 존재를 수치로 환원하는 틀이다.
이 갈등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것은 구조 그 자체다. 자본은 갈등을 통해 효율을 극대화하고, 제도는 갈등을 통해 통제를 정당화한다. 축산업자는 더 많은 생산을 요구받고, 외국인은 더 많은 노동을 요구받는다. 한국인은 경쟁을 통해 자기 위치를 증명해야 하고, 외국인은 순응을 통해 존재를 유지해야 한다. 갈등은 그 요구를 정당화하는 장치다. 그리고 그 장치는 인간을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게 만들며, 존재를 기능으로 환원하는 데 기여한다.
하여간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은 한국 사람 써야 돼. 쌍남이 걔 한 달에 딱 10만 원 써. 그리고 나머지는 다 자기네 나라 보내고, 자본 유출이 별거야? 그런 식으로 우리 돈 외국으로 보내는 애들이 한국에 얼마나 많겠어? 그것 다 한국에 써봐. 금세 경기 좋아지지. 3)
이러한 말은 갈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동시에, 구조가 설정한 기준을 자연화한다. 자본의 흐름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작동하지만, 그 흐름을 막기 위해 인간은 다시 기능화되고, 분류된다. 존재는 고기로 환원되고, 고통은 남지만 이름은 지워진다. 구조는 그 침묵을 이용하지만, 존재는 구조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폭력은 단지 축산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 구조 속에서 기능적 존재로 길러지고,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성적, 실적, 생산성, 효율—이 모든 기준은 인간을 수치화하고, 그 수치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결정한다. 기준에 미치지 못한 존재는 단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잘못된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스스로를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존재의 가치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수치에 따라 결정될 때, 인간은 더 이상 고유한 존재자가 아니라, 구조가 설정한 틀 안에서 작동하는 기능적 단위가 된다.
그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폭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깊숙이 내면화된 구조의 결과다. 우리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스스로를 처벌하며, 스스로를 도태시킨다. 구조는 더 이상 외부의 강제력이 아니라, 내면의 윤리처럼 작동한다. 우리는 기준을 넘지 못한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기준에 미달한 상태를 개인의 결함으로 받아들인다. 구조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을 고쳐야 할 존재로 여긴다. 이때 철학은 그 내면화된 윤리의 작동 방식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감시하게 되었는가, 그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존재는 왜 침묵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구조는 교육, 노동, 의료, 문화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공교육은 인간을 성장시키기 위한 제도라고 배워왔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편의에 맞춰 설계된 커리큘럼에 불과하다. 학교는 군대식 규율을 본떠 만들어졌고, 학생들은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훈육당하며, 성적에 따라 평가받는다. 동물이 사육되고 도축되듯, 인간 역시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훈육되고 소비된다. 교육은 존재의 가능성을 여는 장이 아니라, 기능적 존재를 길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기업 시스템은 인간을 ‘인적 자원’으로 분류하며, 생산성과 효율성에 따라 가치를 매긴다. 노동자는 더 이상 고유한 존재자가 아니라,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화된다. KPI, 성과급, 인사고과 같은 제도는 인간을 수치화하고, 그 수치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결정된다. 존재는 성과로 증명되어야 하며, 실패는 곧 존재의 결함으로 간주된다.
의료 시스템에서도 환자는 종종 ‘질병 코드’로 환원된다. 병원은 환자의 고통을 개별적 삶의 맥락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진료 시간과 보험 청구의 효율성에 따라 판단한다. 인간의 몸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된다. 이는 동물이 질병에 걸렸을 때 치료보다 도태되는 방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고통은 기록되지만, 맥락은 지워진다. 존재는 진단되고, 분류되고, 처리된다.
문화와 예술 영역에서도 인간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SNS에서 우리는 ‘좋아요’와 ‘조회수’로 존재를 증명받는다. 타인의 시선과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되고, 선택되지 못한 존재는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이는 축산업에서 상품성이 떨어지는 동물이 도태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존재는 클릭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술은 표현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되고, 존재는 감정이 아니라, 반응의 수치로 환원된다.
철학이란 사물의 본질, 즉 끊임없이 새롭게 숨겨지는 그 본질에 대한 앎이고, 앞서 도약하면서 새로운 물음의 영역과 관점을 열어주는 앎입니다.
<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물음』, p.22 >
철학은 이 구조 속에서 침묵당한 존재의 본질을 다시 묻는 일이다. 그 본질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드러나기도 숨겨지기도 하는 가능성의 장이다. 철학은 그 장 앞에서 도약하며,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만들고, 침묵 속에서 새로운 물음을 열어젖힌다. 존재는 기능이 아니며, 수치가 아니며, 구조가 설정한 기준이 아니다. 철학은 그 사실을 다시 말하는 일이다.
어느 과학자의 말을 바꿔서 표현해 보자면 생명관에 상관없이 좋은 사람은 동물을 아끼고 악한 사람은 동물을 학대한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는 경우, 그것은 대부분 동물은 물건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4)
우리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살아간다고 믿는다. 복지, 안전망, 국제 질서—이 모든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진보의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희생과 착취가 존재한다. 도널드 트럼프의 관세 정책, 프랑스의 재정 위기,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국제적 긴장들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세계의 이면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최근의 한미 외교 협상은 한국이 협상 테이블에서 주체가 아닌 객체로 기능화되는 구조적 현실을 드러냈다. 미국은 자국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한국을 일방적으로 활용하려 했고, 한국은 그 구조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채 실질적 이익을 얻는 것 없이 외교를 수행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 실패가 아니라,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조차 ‘사용 가능한 존재자’로 환원되는 구조적 폭력의 단면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식민지를 잃었지만, 그동안 축적한 자원과 인프라 덕분에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은 식민지에서 착취한 노동력과 자원을 통해 산업 기반을 마련했고, 이는 복지의 초기 자본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식민지 청산은 정치적 독립을 의미했지만, 경제적 종속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복지의 시작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복지국가는 평등을 지향하지만, 실제로는 세대 간, 계층 간 부담 전가가 존재한다. 현재의 연금 시스템은 과거 세대가 누린 혜택을 미래 세대가 부담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 확대는 복지를 유지하기 위한 현대적 착취의 형태다. 이는 마치 짬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개처럼,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는 대신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는 구조다.
복지국가가 위기를 맞자, 많은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복지의 비용은 개도국으로 외주화 되거나, 이민자 노동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값싼 노동력과 자원은 선진국의 소비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글로벌 착취 구조를 더욱 고착화시켰다.
복지와 평화는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추구해 온 이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구조적 착취와 복종의 내면화가 존재해 왔다.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착취 없는 복지는 가능한가? 도널드 트럼프가 일본을 겁박하고 우리 노동자들을 쇠사슬로 묶은 사건은 생소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점이 노골화된 것에 불과하다. 구한말 조선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일본과 가쓰라테프트 협약을 맺어 일제에게 우리 민족을 넘긴 나라가 누구였던가?
토마스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힘이 곧 정의가 되는 세계—는 다시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어느 한쪽의 폭력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힘의 논리는 강대국의 전략뿐 아니라, 약소국의 대응 방식과 자기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자인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한 물음 없이, 기술적 협상과 실용적 계산만으로 외교를 수행하게 된다면 우리는 주체가 아닌 객체로, 협상의 상대가 아닌 소비 가능한 자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역사를 단순한 과거의 연대기나 사건의 축적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했다. 그는 역사를 ‘존재의 사건’으로 보았으며, 인간은 그 사건 속에서 자신을 해석하고 구성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가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자인지를 묻는 일은 곧, 우리가 어떤 역사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외교는 단지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로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한 역사적 자기 해석의 문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그 드러남의 방식이 곧 우리의 역사다.
따라서 외교의 기술적 계산 너머에는 존재의 방식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역사적 존재로 세계에 응답하고 있는가. 그 물음 없이 수행되는 외교는 단지 기능적 협상에 불과하며, 존재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구조 속에서 소모될 뿐이다.
학대에 길들여진 개는 문을 열어놔도 나가지 않는다. 나가면 죽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5)
폭력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억압하고, 강자가 약자를, 부자가 빈자를, 남성이 여성과 아이들을 지배하며, 그 아래에서는 또 다른 약자가 더 약한 존재를 무시한다. 억압은 아래로 흐르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며, 폭력은 반복된다. 이는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질서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된 결과다.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는 이 구조를 날것으로 드러낸다. 가축의 삶, 그들을 착취하는 노동자, 그리고 그 과실을 향유하는 소비자는 서로 다른 얼굴이지만, 동일한 폭력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 국제 정치의 전략과 축산업의 일상은 영역은 다르지만, 존재를 기능으로 환원하고 수치로 평가하며 도태시키는 방식은 같다.
개는 울타리 안에서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더 약한 개를 물고 뜯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제도, 규범, 경제적 조건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고, 그 불만은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향한다. 구조를 향한 분노는 종종 가장 가까운 약자에게 쏟아지고, 싸움은 아래에서 벌어지며, 위에 있는 자들은 그 싸움을 관망하며 구조를 유지한다. 우리는 먹다 남은 짬밥을 두고 서로를 물고 뜯고, 그 짬밥을 던지는 손에는 꼬리를 흔든다.
푸코는 권력이 단순히 억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하고 조직하며 일상 속에 스며든다고 말한다. 우리는 억압받는 동시에 그 억압을 재생산하는 존재다. 권력은 위에서만 작동하지 않고, 아래와 주변, 관계 속에서 확장된다.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은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는 듯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페미니즘은 성별 권력에 저항하지만 내부의 모순을 외면할 때 또 다른 배제를 낳는다. 전장연의 지하철 투쟁은 처음에는 동정의 시선을 받았지만, 곧 시민 불편을 이유로 분노와 역설적 비판으로 돌아섰다. 성적 소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일부 정체성만이 가시화되고, 나머지는 여전히 침묵 속에 머문다. 이주노동자는 노동권을 주장하지만 같은 계층 내에서 경쟁과 갈등의 대상으로 충돌한다.
이들은 모두 기득권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경계에 있는 자들과 충돌하며 구조의 모순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드러나기도 하고 숨겨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구조는 바로 그 숨겨진 방식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서로를 향해 싸우는 동안 침묵 속에서 작동한다. 철학은 그 침묵을 깨우는 물음이며, 연대는 그 물음에 응답하는 실천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했고, 연대는 타자의 고통이 나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윤리는 동정이 아니라 책임이다.
진정한 연대는 구조가 만들어낸 함정—약자 간의 충돌, 분노의 소비, 권력의 은폐—을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사유와 실천이다. 그것은 “나도 힘들다”는 말에서 시작되지 않으며, “너의 고통은 나의 삶이 속한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연대는 동질성에 기반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며 그 차이 속에서 공통의 억압 구조를 직시한다. 차이를 지우는 연대는 또 다른 배제를 낳지만, 차이를 견디는 연대는 구조를 흔든다. 연대는 위로가 아니라, 함께 울타리를 넘는 결단이며, 그 결단은 철학적 물음에서 시작되고 윤리적 책임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믿어온 질서의 균열이며, 감춰졌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알레테이야(ἀλήθεια)—숨겨졌던 진실의 드러남이다. 한승태는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단지 고기 소비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 온 존재의 침묵을 직시하게 만드는 선언이다. 고기는 식재료가 아니라, 한때 살아 있었던 존재자의 흔적이며, 그 흔적을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존재를 기능으로 환원하는 구조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철학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존재자가 고통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 그 기억이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불러온다. 철학은 그러한 고통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조건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물음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자를 그것이 있는 그대로 만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집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견해도 존재자에 맞추려는 의도가 중시되는 것에서만 있는 법입니다.
<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물음』, p.37 >
철학은 그 잘못된 견해조차 존재에 대한 진지한 응답으로 받아들이며, 그 응답을 통해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존재의 침묵을 깨우는 일, 그것이 철학의 시작이며, 연대의 윤리다.
그들은 "정신을 전혀 갖고 있지 않고 기관의 배치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본성인" 무언가가 아니었다. 반대로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고 그 기억 때문에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괴로워하는 존재였다. 6)
작가는 우리가 구조화된 시스템 속에서 살지라도 인간다움을 지켜내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왜냐하면 동물에게 대하고 있는 것들이 인간에게도 그대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씁쓸하지만 되새김질해봐야 할 통찰이다.
우리는 종종 동물을 단순히 반응하는 대상으로 인식하지만, 고통을 기억하고 그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윤리적 타자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들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라, 고통을 기억하는 존재자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감각과 정서가 얽힌 흔적이며, 그 흔적은 존재의 깊이를 형성한다.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존재자가 고통을 기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불러온다. 고통을 기억하는 존재 앞에서 우리는 생물학적 분류나 기능적 환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고유성을 마주하게 된다. 철학은 그러한 고통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조건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물음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묻는다면, 철학은 응답할 것이다. 그 응답은 정답이 아니라 더 깊은 물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그 길은 우리가 존재의 신비 앞에 멈춰 서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오는 자리에서 열린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의 조건들이 갑자기 질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놀라움과 막연한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오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존재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끝없이 열리는 물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철학은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물어야만 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물음은 우리를 다시 삶의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는다—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응답하며, 다시 살아간다.
『 잔혹동화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본래 의미: ‘지혜에 대한 사랑’
현대의 왜곡된 이해: 지적 우월성과 소유 욕망
하이데거의 비판: 존재자에만 집중한 철학, 존재 자체의 망각
철학의 시작: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II. 존재와 구조
『 고기로 태어나서』의 문제의식
축산업과 도축 현장의 구조적 폭력
수평아리 매몰 처분의 반복성과 제도화된 무감각
생명을 기능으로 환원하는 인간의 기준
도축장의 풍경과 인간 사회의 구조적 유사성
존재의 침묵과 철학의 물음
III. 갈등의 구조
돼지 사육 과정의 폭력적 관행
인간 사회의 기능화: 외국인 노동, 한국인과의 관계
갈등의 언어: 효율과 기준
구조가 갈등을 통해 유지되는 방식
교육, 노동, 의료, 문화 속의 기능화된 인간
내면화된 구조와 자기 감시
철학의 과제: 내면화된 윤리의 작동 방식에 대한 질문
IV. 국제관계와 자연상태
동물에 대한 태도와 인간 사회의 착취 구조
국제 질서 속의 구조적 폭력: 한미 외교 협상 사례
복지국가의 기원: 식민지 착취와 자원 축적
현대 복지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개혁
글로벌 착취 구조의 고착화
홉스의 자연상태와 힘의 논리
하이데거의 역사 이해: 존재의 사건으로서의 역사
외교와 존재의 방식에 대한 철학적 물음
V. 구조의 재생산과 연대의 윤리
폭력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
축산업, 국제 정치, 사회 제도의 동일한 폭력 패턴
억압의 재생산: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구조
푸코의 권력 이해: 억압과 생산
사회적 약자 내부의 갈등과 배제
철학의 역할: 구조의 침묵을 깨우는 물음
레비나스의 윤리: 타자의 얼굴과 책임
진정한 연대: 차이를 견디며 구조를 흔드는 실천
VI. 침묵과 응답
동물의 고통과 기억: 윤리적 타자로서의 존재
고통을 기억하는 존재 앞에서의 철학적 물음
철학은 정답이 아니라 더 깊은 물음으로 이어지는 길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철학의 시작
존재는 끝없이 열리는 물음이며, 철학은 그 응답
♧ 참고도서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시대의 창, 2018.04.27 >
1) 94p
2) 204p
3) 196p
4) 263p
5) 420p
6) 461p
7) 11p
<『철학의 근본물음』, 마르틴 하이데거, 한승수 옮김 시대의 창, 2018.02.28 >
존재자(Seiendes): 우리가 보고, 만지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구체적 사물이나 생명체. 닭, 돼지, 개, 인간, 제도, 규범 등
존재(Sein): 존재자가 ‘있을 수 있게 하는 방식’, 즉 존재자들이 드러나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조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열리는 가능성의 장.
& 나는 한승태 작가의 책을 읽으며 오래전 부산 비엔날레에서 보았던 작품을 떠올렸다. 쇠꼬챙이에 꽂혀 있던 고깃덩어리—그때는 단순히 잔혹한 설치 미술로만 보였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한 고기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기능으로 환원된 생명의 흔적이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뒤늦게 나의 인식을 꿰뚫었고, 내가 부분적으로만 감지하고 있던 사회의 모순들이 한순간에 연결되는 듯한 경험을 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기에 그런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복잡한 논제들을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느냐였다. 나는 하이데거의 『철학의 근본물음』에서 가치 명제를 끌어올릴 수 있었고, 한승태 텍스트 특유의 시니컬하면서도 동정 어린 문체가 내 글에 한층 더 설득력을 부여했다.
수평아리의 삶에서 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았다. 생산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버려진다. 수평아리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사회에서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곧 죄가 된다. 그렇다면 생명이 태어난 것 자체가 범죄라는 말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가 떠오른다. 종교적 원죄는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지만, 산업사회에서의 원죄는 구조가 부여한 기준에 맞추지 못한 개인의 실패로 환원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처럼 받아들이며, 구조가 만든 잣대에 맞추지 못한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한다.
그런데 나만 죄인인가? 아닌 듯 설교하는 저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구조의 대리인으로서 죄의 개념을 이용해 인간을 길들이고, 사회적 기준을 정당화하며, 구조의 작동을 은폐한다. 그러나 그따위 해괴망측한 논리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 철학은 바로 그 논리를 낯설게 만들고, 우리가 죄인으로 규정되는 방식 자체를 다시 묻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누가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사회를 설계했는가? 그것은 바로 구조다. 구조는 사람들을 길들이고 훈육하며,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극단주의자들처럼 구조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구조가 완전히 붕괴하면 인간 사회 자체가 함께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구조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구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순덩어리이며, 구조 또한 그런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민주사회라 해도 계급과 고착화된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위치에 있는 자들이 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사다리를 걷어차며 구조를 영구화하려는 시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구조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권력자들은 사회를 설계하고 앞잡이를 동원해 분열을 조장하며, 그 과정을 정당화하려 한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불평등이 은폐되기도 하고, 시민의식이 흐려질 때 구조는 더욱 공고해진다. 그러나 의식 있는 시민이라면 그런 시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별을 거부하는 데 있다. 구조를 직시하는 일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권력의 정당화 논리를 깨뜨리고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우리가 구조를 들여다보는 순간, 권력의 은폐된 기제가 드러나고, 그 틈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구조의 축은 강자에게 기울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상대적 약자들에게 더 큰 압력으로 기울어진다. 강자는 구조 속에서 이미 보호받고 있으며, 그 압력은 늘 약자에게 전가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약자들에 대한 착취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오히려 약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힘을 모으면, 강자는 상대적인 약자가 된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고도 결국 움직이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힘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트럼프가 결정을 반복하며 흔들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권력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연대의 힘 앞에서는 언제든 균열을 드러낸다.
하지만 연대는 단순한 감정적 결속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이 전제될 때만 지속된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금세 와해되고, 혁명의 역사가 오래가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대가 무너지면 그 틈을 타 독재와 억압의 기운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역사는 늘 이 반복을 보여준다—저항과 연대, 와해와 억압, 그리고 다시금 저항.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의식과 집중을 기르는 일이다. 구조는 약자를 분열시키려 하고, 권력은 그 틈을 이용해 정당성을 가장한다. 그러나 약자들이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인식할 때, 구조의 압력은 균열을 맞이한다. 연대는 단순한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구조를 흔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힘이다.
정삼각형의 구도는 완전성을 상징한다. 세 변이 서로 긴장과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듯, 사회도 권력과 시민, 제도가 서로 견제할 때만 안정된다. 균형이 무너지면 구조는 압력으로만 작동하고, 억압은 다시금 스며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
물론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그런 여유를 갖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 가치 있다고 믿는 것에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구조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식이다. 그렇게 해야 다른 부분에서 여유를 확보할 수 있고, 그 여유를 타인과 나눌 수 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그 여유에서 비롯된다.
여유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공통분모를 확장하는 힘이다. 그 힘을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별을 거부할 수 있고, 구조 속에서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정삼각형의 완전성이 단순한 도형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의식과 집중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내는 은유가 되는 것이다.
< 괴물 >
깊고도 넓은 푸른 바다,
넘실거리는 욕망의 파도
세상은 디즈니랜드의 축소판
죽은 것이 살아있는 것을 지배하고
혼돈과 질서는 끝없이 싸움을 한다.
바다 표면에서 깊은숨을 뿜어내고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바라보는,
거대한 존재, '리바이어던'
이해할 수 없는 힘과 신비
모든 것을 삼킨 백색 공포
서서히 먹잇감을 향해 엄숙한 입을 벌리고,
눈이 멀어버린 인간은 힘없는 작살을 던진다.
한 가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채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맛있는 먹을거리뿐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 역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식 자리에서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