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도시생활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유한계급론, #배블런

by 비루투스

* 엄마가 한 손에 그 두 가지 답을 다 갖고 있다는 데, 동시에 '나는 매일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는 데, 부모님은 어떻게 맨 정신으로 삶을 견디는지, 어떻게 그렇게 조금도 취하지 않고 하루를 견디는지' 궁금했다. 1)



몇 달 전 인사발령이 있었다. 근무지는 그대로였지만 팀이 바뀌면서 가장 난감했던 점은 근무 일정과 개인 스케줄이 뒤엉켜 버린 것이었다.


나는 공항에서 교대근무를 한다. 이틀 일하고 이틀 쉬는 방식이라 겉으로 보기엔 괜찮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쉬는 날에 우리는 일하고, 남들이 일하는 날에 우리는 쉰다. 쉬는 날이 주말이면 의무적으로 보충근무를 나와야 하고, 그것이 두 번 겹치면 팀원들끼리 조정하지 않는 이상 주말 약속은 잡기 어렵다. 근무일에는 연가라도 쓰고 싶지만 한 번에 한 명만 가능해 쉽지 않다. 게다가 주말 보충근무는 연가로도 빠질 수 없다. 그래서 팀이 바뀐 뒤 한동안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머물렀다.


예전처럼 야간근무를 하지 않으니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평일에 이틀씩 집에 머물다 보니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고, 새벽 출근이 있는 날은 전날 밤 잠을 설치곤 했다. 몸은 덜 피곤해졌지만 원하는 날짜에 스케줄을 맞추지 못하니 자연스레 사람들과 멀어졌다. ‘요새 얼굴 보기 힘들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몰려왔다. 승객은 늘어가는데 직원은 전혀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팀원들에게 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다행히 독서모임을 위해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었다.



독서와 환상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철학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글을 쓸 동기도 점차 희미해졌다. 고독은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때 품위 있는 것이지만, 강제로 당하는 순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럴 때는 환상이라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모임의 추천 도서인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게 되었다.


책은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뉴스 기사 속 단편적인 사건들 뒤에 숨어 있는 서사들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등장인물들은 어느 한쪽으로 규정하기 애매한, 어중간한 사람들이다. 잘 사는 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외된 것도 아닌, 겉으로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강박과 박탈감에 신음한다. 정상 같지만 정상은 아닌, 그저 어쩔 수 없이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에는 ‘소외’와 ‘불안’이라는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계급과 소비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면, 사랑이나 어떤 지위 혹은 명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예감하곤 했다. 2)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가치처럼 들리지만, 역사적으로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상공업자들이 부와 권력을 축적하며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상하자, 기존의 귀족·지주 계급은 자신들의 지위를 차별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이를 내세운 측면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이라기보다 사회적 구분을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이러한 맥락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상류층이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소비한다고 분석했다. 명품을 구입하거나 교양을 과시하는 행위는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신분을 드러내고 구분 짓는 전략이었다. 심지어 교육조차도 당시에는 사치재로 간주되었으며, 지식을 얻는 행위가 곧 사회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오늘날에도 지식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러한 차이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작품에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이 전반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그중 첫 번째 단편 「홈 파티」는 계급의 후광을 좇는 개인의 시선을 통해 상류층의 이중적인 행태를 포착한다. 그들은 경험하지도 못한 다른 이들의 삶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의 잣대를 들이밀고 재단한다. 끓어오르는 불편함을 참지 못한 ‘이연’은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지만, 값비싼 찻잔을 깨뜨리는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권력의 위계를 인정하며 집을 나선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편 역시 ‘집’을 주제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그 앞에서 좌절하는 개인의 한계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을의 자각


오늘 하루, 이곳에서만 고맙다는 말을 세 번이나 들었는데 가슴이 왜 이렇게 휑한지 모르겠다고.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택시가 고속도로 위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3)

「숲 속 작은 집」에서 ‘나’는 직장 내 갑질로 인해 퇴사한 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상사에게 ‘잘린 걸로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녀는 메이드에게 팁을 건네면서도 혹여 실례가 될까 불안해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메이드의 딸이 부서진 물건을 변상하기 위해 같은 말을 했을 때, 어머니가 ‘늘 고마워’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을’의 위치에 머물러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 장면은 단순히 개인적 경험을 넘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감사하다’는 말이 어떻게 권력의 위계와 맞물려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감사의 표현은 겉으로는 예의와 배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의 지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낮은 위치를 확인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결국 ‘나’의 깨달음은, 을의 자각과 그 한계가 일상적인 언어와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좋은 이웃」에서 ‘나’는 프리랜서 과외교사이자 세입자로, 몸이 불편한 시우를 안타깝게 여겨 시급을 올리지 않고 공부를 가르친다. 그녀는 스스로 ‘좋은 이웃’이 되고자 했지만, 시우가 ‘공동체, 이웃, 연대’라는 단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과 의문을 느낀다. 그러던 중 시우네 가족이 신축 아파트로 이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동정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어설펐는지를 깨닫는다. 그 순간 ‘좋은 이웃’이라는 이상은 단순한 선의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음을, 그리고 관계의 균열 앞에서 자신이 결코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 장면은 ‘이웃’이라는 개념이 단순한 물리적 거주 공간의 공유가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조건과 심리적 거리까지 포함된 복합적 관계임을 드러낸다. 결국 ‘나’의 깨달음은, 선의와 동정만으로는 진정한 연대가 만들어지지 않으며, 계층과 조건의 차이가 여전히 벽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소통의 균열


당연한 얘기지만 긴 시간 엄마 옆에 머물며 내가 가장 그리워한 사람은 현수였다. 나와 결혼할 뻔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고독을 겪은 사람이라 그랬다. 4)

「이물감」과 「안녕이라 그랬어」는 모두 소통의 부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두 작품 속 남성 인물들은 전형적인 남성상을 보여주는데, 자수성가형이며 위기를 겪어본 경험과 그것을 해결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문제에 직면하면 상황을 설명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이는 사회가 남성에게 기대하는 ‘해결자’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반면 여성 인물들은 문제의 원인이나 해결책보다 위로와 공감을 원한다. 그들은 이해받기보다 감정을 나누고, 상처를 덜어내는 과정을 통해 관계의 의미를 찾는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남성과 여성의 해석 방식이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성은 ‘왜’와 ‘어떻게’를 묻지만, 여성은 ‘함께 느끼는 것’을 바란다.


이 차이는 결국 서로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남성은 자신이 충분히 설명하고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위로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관계는 어긋나고, 끝내 ‘안녕’이라는 말로 정리된다. 남성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별을 통보받고, 여성은 자신의 진심을 전자매체에 담아 보낸다.


두 작품에서 ‘이물감’과 ‘안녕’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균열을 드러내는 장치다. ‘이물감’은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이 만들어낸 거리감을 상징하고, ‘안녕’은 그 거리감이 더 이상 좁혀지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인사다. 결국 문제는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이 만나지 못하는 데 있다.


기태의 전처 희주는 은유적으로 ‘식물’에 비유될 수 있다. 그녀는 햇살의 따뜻함은 받아들이지만, 뜨거운 열기 앞에서는 움츠러드는 속성을 지닌다. 아마도 기태와의 이별 이후, 희주는 차대표에게서 자신이 선호하는 기질을 발견한 듯하다. 두 사람은 요가 강사와 수강생, 식당 대표와 손님이라는 관계 속에서 만나게 된다.

기태는 우연히 희주의 SNS에서 그들의 교제 흔적을 발견하고, 질투라기보다는 어떤 낯선 ‘이물감’을 느낀다. SNS가 본질적으로 ‘가상’, ‘과장’, ‘허위’라는 부정적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고려할 때, 기태가 차대표에게서 감지하는 것은 ‘가벼움’과 ‘거짓’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태가 지수와의 관계 속에서 차대표와 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그때 그는 억눌러온 감정이 역류하듯, 몸 안에서 식도염이 치밀어 오르는 경험을 한다. 이는 단순한 신체적 증상이 아니라, 자기 동일성의 붕괴와 자기혐오가 몸으로 드러나는 은유적 장치다. 기태가 타자에게서 느낀 이질감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도 발견되며, 그 불편함이 신체적 고통으로까지 침투한 것이다.

결국 '이물감'은 개인적 관계의 갈등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SNS가 인간관계에 끼치는 왜곡과 불안, 그리고 자기 인식의 고통을 신체적 은유를 통해 드러낸다. 기태의 식도염은 ‘타자와의 차이’가 무너지고 ‘자기와의 동일성’마저 흔들리는 순간의 불편함을 상징하며, 이는 제목 그대로의 ‘이물감’을 가장 극적으로 체현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한편 『안녕이라 그랬어』에서는 팝송의 영어 가사를 잘못 알아듣는 여주인공과, 그것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현수의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언어적 오해를 넘어, 두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언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미묘한 간극은 결국 서로의 삶을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로 이어지고,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두 사람의 접근법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누적되며 결국 이별의 촉발제가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안녕이라 그랬어』는 단순히 관계의 단절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 작품 역시 현대의 기술적 도구를 소재로 삼지만, 『이물감』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여기서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이는 ‘외국인 강사’라는 매개를 통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진심을 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직접적인 대화가 아닌, 물리적·언어적 거리를 지닌 매체를 통해서만 마음을 표현한다는 점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큰 울림을 준다. 이는 소통의 실패가 단순히 단절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전달되지 못하더라도 ‘전하고 싶다’는 충동을 드러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독자는 대상의 결여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적인 그리움을 감지하게 된다.



작은 위로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아니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기쁘다.
예. 5)

『레몬케이크』와 『빗방울』은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기진은 독신자로, 점차 약해져 가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안정된 직장이 없어 독서 모임을 운영하지만, 작가의 펑크로 인해 그마저도 순조롭지 않다. 그리고 지수는 전세 사기를 당한 뒤 무리하게 대출금을 갚던 남편 수호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는다.

이들의 삶은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현실을 반영한다. 경제적 기반은 무너지고, 공동체적 위로조차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은 고립된 개인으로 남는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진 듯한 현재에도, 과거의 기억과 타인과의 작은 연결이 그들을 지탱한다.

기진은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레몬케이크를 먹으며 인생의 양가적 감정을 곱씹는다. 인생은 즐겁지 않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어머니의 검사지 문항은 그에게 묵직한 위로를 건넨다. 지수는 빗방울 소리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리듬을 느끼며, 외국인 도배사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짧은 질문 속에서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한다.

이 두 작품의 특징은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거창한 희망이나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아주 작은 순간과 관계가 삶을 붙잡는 힘으로 작용한다. 레몬케이크의 맛, 빗방울의 소리, 타인의 짧은 말 한마디가 인물들에게는 삶의 이유가 된다. 이는 거대한 구조적 불안 속에서도 미세한 감각과 작은 관계가 인간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방인


김애란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계약직이나 프리랜서, 혹은 아스팔트 위에 흩뿌려진 민들레 홀씨처럼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나름의 도덕적 기준과 자존감을 지니지만 계층과 신분의 문턱에서 좌절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정은 상실과 박탈감으로 변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순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책 속 인물들의 불안과 박탈감은 지금의 내 상황과도 묘하게 겹쳐 보였다. 갑작스러운 인사발령으로 인천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나는 본의 아니게 팔자에도 없던 수도권에 정착하게 되었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어떤 진실을 깨달았다. 코로나 이후 더욱 선명해진 그것은 바로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주어진 삶을 의식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연봉이나 부동산 같은 구체적인 지표 앞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 언저리에 다가갈수록 문제들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인에게는 ‘연봉’과 ‘정규직’, 독신자에게는 ‘결혼’, 기혼자에게는 ‘부동산’과 ‘교육’ 같은 또 다른 기준이 삶을 옥죄어 온다.


그럼에도 주변에서는 여전히 내가 철이 없고 세상을 모른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아쉬운 게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상황을 직접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이 그런 말을 내뱉을 때는 깊은 모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작품 속 인물들이 서로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표면적인 판단만 내리는 장면들은, 내가 겪고 있는 현실과 유사하다. 만약 내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사회적 기준과 편견은 더 가혹하게 나를 규정했을 것이다.



독서와 상상력


나는 정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진보’와 ‘보수’ 같은 구분을 믿지 않는다. 그럴싸한 이야기를 내세우지만 결국은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빼앗으려는 말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적 가치를 내세우며 그들은 자신들만의 경계를 만들고, 다른 이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결코 오를 수 없는 기준을 계속 내세운다.


그들은 중세의 왕과 귀족들처럼 법과 원칙을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한다. 그 결과 민주정치의 기반인 견제와 균형은 무너지고, 극단이 극단을 낳는 상황이 반복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자본이 권력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도 좌우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정 정치인의 현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보다 그 배후에 있는 구조적 원인들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안 되는 건 나 위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적어도 지금보다 나이가 좀 더 어렸을 때는 그랬다. 그러나 요즘에 문득 드는 생각은 그들 중에는 내 자신의 모습도 함께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흔히 ‘문사철’로 불린다. 역사는 사건을 기록하고, 철학은 그것에 대한 가치 판단과 개념적 틀을 제공한다. 그리고 문학을 맨 앞에 두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엮어내는 힘이 바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단순한 감정의 장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힘이다.


내가 원하는 독서는 단순히 취향이나 스토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방식은 결국 ‘그저 그런 수준’에 머물게 한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독서는 인문학적 통섭 능력을 필요로 한다. 독서는 나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을 해석하고 사회를 이해하며 미래를 상상하는 도구다. 그것은 개인의 고독을 넘어 공동체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고, 현실의 불안과 박탈감을 넘어설 수 있는 작은 길을 열어준다.


그리고 우리가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여유란 단순히 시간을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생각하는 힘,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여유를 가질 때, 그들이 만들어놓은 경쟁과 불안의 구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 순간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가 되고, 그들의 권력은 흔들린다. 여유는 단순한 쉼이 아니라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서로를 바라보게 하며,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게 한다. 바로 그 점에서 여유는 가장 혁명적인 힘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불안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민들레 홀씨만이 하늘을 날 수 있다.



『 슬기로운 도시생활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독서와 환상

교대근무로 인한 고립 → 김애란 단편에서 ‘소외·불안’과 겹쳐 읽음.


II. 계급과 소비

「홈 파티」: 상류층의 위선과 소비 과시 → 베블런 『유한계급론』과 연결.


III. 을의 자각과 한계

「숲 속 작은 집」: ‘감사하다’는 말의 위계성.

「좋은 이웃」: 선의만으로는 연대 불가능.


IV. 소통의 균열

「이물감」, 「안녕이라 그랬어」: 남녀 소통 방식 차이, SNS·언어 오해 → 관계 단절.


V. 작은 위로

「레몬케이크」, 「빗방울」: 사회적 불안 속에서도 작은 순간이 삶을 지탱.


VI. 이방인

작품 속 불안과 박탈감 ↔ 인천 생활의 ‘이방인’ 자각.


VII. 독서와 상상력

독서는 사회 해석·미래 상상 도구.

여유는 경쟁 구조를 흔드는 혁명적 힘.

결론: “민들레 홀씨만이 하늘을 날 수 있다.”



♧ 참고자료


< 김애란, 안녕이라 그랬어, 문학동네, 2026.01.10.>

1) 213p

2) 43p

3) 95p

4) 252p

5) 212p

6) 294p



& 내가 사는 곳에서 지하철로 20분 거리에 예술영화관이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았다가 점차 예술영화의 매력에 빠져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그곳을 찾는다. 상업영화의 고정된 클리셰보다 미시적인 관점을 들여다보고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예술영화의 시선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장면 때문에 끔찍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불편함이 오히려 삶을 더 깊게 바라보게 만든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사회적 약자는 아니지만 주목받지 못해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다. 평범한 삶을 산다고 믿으면서도 어딘가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는 내 삶과 겹쳐진다. 불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단단히 여미려는 모습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인천으로 올라왔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약점은 ‘거주지의 불분명함’이었다. 관사에 살면 돈은 절약할 수 있지만 사회적 이미지에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을 산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막막하기만 했다.

서울로 상경하는 지방민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부분은 겉모습만 보고 서울살이를 만만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주거지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부터 이미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서울 사람 이 다된 것처럼 지출을 이어간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리를 잡을 즈음에는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 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이리저리 떠돌다 나이만 먹고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세상은 언제나 기준을 세워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비난하거나 자책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책임 없다는 듯 무심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그러한 불안을 안고 산다. 어떤 경우에는 짓눌리고 아파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다운 모습을 회복하려 애쓰고 어떻게든 자신의 삶에 존엄을 더하려는 노력 속에서 작은 희망의 싹을 틔운다. 어쩌면 이런 시도들이 무의미하거나 공산주의적 착각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틈사이를 우리가 들여다보고 조금씩 벌려 나갈 때, 삶의 균열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스며든다. 그것은 완전히 낯선 의미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의미 위에 또 다른 층위가 덧입혀지는 과정과 같다. 그렇게 덧입혀진 의미는 일상의 사소한 장면조차도 다른 빛깔로 바라보게 만들며, 현실의 균열 속에서 삶을 다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한다. 결국 불편함을 직시하는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존엄과 희망을 발견하게 하고, 빛은 그 작은 틈새에서 번져 나온다.


< 도시를 걷다 >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가로등의 빛이 길을 환히 비춘다.

도시의 얼굴들을 본다.
찌든 삶의 흔적과 텅 빈 마음들
덧없는 희망을 찾아, 사라진 꿈은 어디에?

도시의 맥박을 느낀다.
소음은 크고, 침묵은 더 깊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조명은 형형색색으로 바닥을 물들이고,
고독에서만큼은 모두가 혼자는 아니다.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그 답 또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하지만 대답 따위 아무도 들려주지 않을 테지.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지수가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방금 전 낙숫물에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이 집에 일부를 흘리고 간 단어마냥 툭툭.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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