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에세이를 쓰는 이유

#상황과 이야기

by 비루투스

* 익숙한 것을 꿰뚫고 들어가기란 당연한 듯 쉽게할수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힘들고 또 힘든 일이다. 1)


나는 언제까지 글을 쓰게 될지 알 수 없다. 직장인의 일상은 늘 예측할 수 없고, 시간은 언제나 빠듯하다. 인사가 어떻게 정해질지, 어떤 업무가 배정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묻혀 있던 나를 다시 불러내는 의식적인 행위임은 변함이 없다. 사정이 허락하는 한,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다른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망도 아직은 없다.



기질과 스타일

일화를 말하고, 묘사를 빚어내고, 나만의 추측에 탐닉하는 일은 피하려 했다.논점을 명확히 하고, 분석을 전개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에만 내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 2)


지금은 브런치스토리에 일주일에 한 번 글을 올리며, 글쓰기를 삶의 중요한 패턴으로 삼고 있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계기는 단순했다.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감상문 수준에 머물렀지만, 사람들은 내 글이 논리적 구조가 정연하고 기승전결이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내가 법학을 전공하며 답안지를 작성하던 습관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안정적인 점수를 위해 다수설이나 판례를 따르기보다, 소수설을 전면에 내세우고 기존 학설을 비판·분석하는 입장을 취하곤 했다. 다수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언더독’ 기질이 강했기 때문이다.


글에 에세이적 색채가 더해진 것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모임을 진행하면서였다. 독서클럽에서 갑작스럽게 진행자로 추천받아, 관심이 크지 않았던 분야의 책을 읽고 발제까지 준비해야 했다. 질문을 이끌어내기 위해 두꺼운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세이건의 서술 방식과 문장 구조가 자연스럽게 내 글에도 스며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의문을 제기하고 발췌한 문장을 논리적으로 엮는 데 집중했다.


별의 생성과 죽음을 접하며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주제를 인문학의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나름의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었고, 브런치에서 작가로 등록되기도 했다.



패턴과 해석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놓쳤던 점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서술자에서만 이런 관점이 나올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3)


나는 창의적인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 분석에만 치중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추구하는 상상력의 결이 조금 다를 뿐이다. 글을 쓸 때는 발췌한 문장 중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것을 화두로 삼고, 그것을 반복해서 음미하다 보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어렴풋하게 어떤 단서가 떠오르면 내키는 대로 적어보는데, 이런 무의식적 기록 과정을 나는 ‘자동연상법’이라 부른다.


책을 읽다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는 손으로 적는다. 필체가 서툴더라도 좋은 문장을 받아 적을 때 그 기운이 손끝에서 전해지고, 이전에 읽었던 것들과 연결되며 구조가 떠오른다. 그렇게 쓰다 보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나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권을 깊이 읽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독서 모임은 책의 스토리에 집중해 감상을 나누지만, 나는 작가를 우상화하거나 그 안에만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양한 책을 읽다 보면 분야가 달라도 결국 유사한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형태는 달라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추구하는 상상력은 그러한 특질들을 엮어 패턴을 추출하고 논지를 확장하여 세계를 더 높은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충돌 그리고 조화

나 자신을 잃을 일 없다는 사실을 돌연 깨달았다. 내게는 나를 위해 싸워줄 서술자가 있었다. 4)


물론 이런 접근을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해당 분야를 전공했다는 이들 중에는 자신이 파악한 것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단지 지식이나 의견에 불과할 뿐, 굳이 구속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다양한 생각과 이론들이 충돌하며 글 속에서 나름의 질서가 확립될 때 얻게 되는 깨달음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내가 추구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내가 탐구하려는 것은 사실의 정밀한 증명이 아니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문장이 던져주는 직감적인 울림이다. 그 울림이 만들어내는 파장은 맥락 속에서 단어들의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고, 다시 나를 사유의 길로 이끈다. 글쓰기는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내면의 울림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이다. 나는 그 과정 속에서 삶을 이해하고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글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게 되면, 나는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고 주의를 환기하거나 논거를 강화할 문장을 삽입한다. 이 과정은 책의 목차와는 무관하며, 오직 나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배치된다. 글을 다듬는 과정에서 나는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다.


신문 스크랩, 포스터, 광고 메시지를 혼합하는 '콜라주'는 서로 다른 맥락을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기성품에 새로운 개념을 부여하는 '레디메이드'는 일상의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고, 평범한 문장에 새로운 해석을 덧입힌다. 존경하는 작가의 글을 활용하는 '오마주'는 단순한 인용을 넘어, 그들의 사유와 나의 생각을 교차시키며 글에 깊이를 더한다.


그리고 각각의 자아는 ‘오브제’로서, 글로는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운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글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충돌과 변형, 교차와 낯섦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장치가 된다.



퇴고와 예술


인간은 가장 깊숙한 내면의 자아가 좋아하는 일을 할때 그리고 가장 깊숙한 내면의 자아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아! 그러려면 그 깊숙한 곳으로 뛰어내려야 한다. 5)


퇴고는 글쓰기보다 더 힘든 과정이다. 난삽한 문장과 오타를 솎아내고, 흐름과 맞지 않는 문장은 과감히 삭제해야 한다. 이는 도공이 기준에 맞지 않는 도자기를 부숴버리는 마음과 같다. 글을 빚어내는 과정에서 가장 냉정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퇴고다. 애착이 남아 있는 문장을 버려야 할 때, 나는 비로소 글이 나를 떠나 독자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퇴고 과정에서 나는 지식과 생각, 경험과 영감을 혼합해 ‘자아’라는 용광로에 넣는다. 무의식은 의식으로 승화되고, 그렇게 하나의 글이 완성된다. 이때 글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나의 내면과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글을 쓰는 동안은 나 자신에게 몰입하지만, 퇴고를 거치며 글은 독자와의 대화를 준비한다.


결국 퇴고란 글을 완성하는 마지막 손질이 아니라, 글을 통해 나와 세계가 만나는 문을 여는 과정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본질만 남겼을 때, 글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빛을 발한다. 나는 그 순간, 글쓰기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예술임을 실감한다.




『 맺음말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익숙한 것을 꿰뚫는 어려움
- 불확실한 일상 속에서도 글쓰기는 자기 소환의 행위.
- 다른 욕망보다 글쓰기를 지속하려는 의지.

II. 기질과 스타일
- 논리적 구조와 분석 중심 글쓰기.
- 법학적 사고와 ‘언더독’ 기질 반영.
- 『코스모스』 경험으로 에세이적 색채 강화.

III. 패턴과 해석
- 서술자의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 발견.
- ‘자동연상법’으로 사고 확장.
- 깊이 읽기를 통한 패턴 추출과 세계 해석.

IV. 충돌 그리고 조화
- 다양한 관점 충돌 속 질서와 깨달음.
- 직관적 울림을 중시하는 글쓰기.
- 콜라주·레디메이드·오마주 기법 활용.

V. 퇴고와 예술
- 퇴고는 냉정한 정리 과정.
- 불필요한 문장 제거 후 독자와의 대화 준비.
- 글은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예술로 승화



<『 상황과 이야기 』, 비비언 고닉, 이영아 옮김, 마농지, 2023.09.05 >


1) 13p

2) 15p

3) 29p

4) 30p

5) 78p

6) 155p



& 처음 내 글을 접하는 사람들은 분량이 많고 난해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쉽게 읽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이 글들이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간절함 속에서 자존감을 지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알아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세계문학과 위인전을 반복해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트로이의 비운의 영웅 헥토르였다. 그는 신들이 트로이를 버리고 자신이 전쟁에서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 있던 나에게 헥토르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군 생활을 의경으로 복무하며 경찰들과 사회의 미시적 영역을 경험했고, 법학은 그 사회를 진단하고 정의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다. 스물한 살에 변사체를 마주한 이후,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떨칠 수 없었다. 그 끌림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고, 만들어진 환상을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다시 책을 읽고, 의식을 넘어 무의식의 영역까지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단어가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의미는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하기 위해 타인의 기준에 맞추는 대신, 스스로 단어를 발굴하고 의미를 확장해 문장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의 필명은 ‘비루투스’이다. 이는 상황을 통제하고 운명(Fortuna)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힘으로 이해되는 단어로,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따왔다. 우리말로 가장 가까운 표현은 ‘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덕은 단순히 도덕과 동일시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노예도덕’처럼 길들여진 체계도 아니고, ‘주인도덕’처럼 공격적인 개념도 아니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것은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하고 아우를 수 있는 ‘덕’ 그 자체다. 이는 가장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지향점을 추구했던 마키아벨리의 관점과도 맞닿아 있다.


흔히 마키아벨리를 ‘성악설’이나 ‘군주제 옹호론자’로 이해하지만, 그는 그러한 치우침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와 구성원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며 ‘공화국’의 원리를 강조했고, ‘힘’ 그 자체를 탐구했다. 결국 ‘악’과 ‘군주제’는 마키아벨리에게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 글의 출발점은 단테의 『신곡』이다. 그는 행복과 쾌락을 좇기보다 세상을 직시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갔다. 중상모략과 평가절하에도 흔들리지 않고, 스승과 함께 베아트리체를 만나기 위해 끝없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결국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유배지에서 천국을 맛보며 작품을 완성했다.

나 역시 그를 스승 삼아 대화하며 그 여정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글을 쓴다. 그래서 글은 개성이 강하고 때로는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듯 보일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목차를 통한 구조화를 시도했고, 독자가 글을 정리하며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글은 지옥·연옥·천국의 여정을 닮은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지옥은 현실의 혼란, 연옥은 사유의 정리, 천국은 깨달음의 순간이다.


본문은 지옥이다. 단테가 ‘왜 의인은 고통받고, 악인은 잘 사는가’라는 질문을 품었던 것처럼, 나는 현실에 대한 의문과 혼란을 본문 속에 담았다. 목차는 연옥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인도했듯, 단테는 나를 이끌었고, 나는 독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나의 고민을 곱씹을 수 있도록 목차를 배치했다. 또 하나의 에세이는 천국이다. 사유와 정리의 과정을 거친 끝에 얻은 감상을 담아, 독자가 빛과 울림을 맛보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시와 인용문은 그 여정을 마친 뒤 남겨진 여운이다. 글이 직접 설명하지 못한 감각을 은유와 언어로 드러내며, 독자의 내면에 깊이 스며드는 흔적을 남긴다.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흔들리지만, 문장을 통해 나를 붙잡고 세상과 대화한다.
독자가 반드시 나와 같은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단어를 발견하고, 의미를 확장하며, 끊임없는 질문을 좇아 자기 가능성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스스로의 문장으로 엮어내며 삶을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나는 여기서 글을 마치지만, 삶은 언제나 새로운 질문을 던져줄 것이다. 독자들도 그러한 질문들에 고민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란다.



< 시작 >


삶이 자신의 이름을 상실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질문들에 대답해야만 한다.


어차피 삶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러한 파편들을 그러모으는 것이 앎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이는

새롭게 태어날 가능성에 몸을 맡기고


과거와 미래가 뒤얽힌 시공간에 홀로 머물러

온몸으로 마주하고 양팔로, 그것을 얼싸안아


감정의 흐름에 손을 휘젓고 단어를 건져내어,

이성은 정해진 뼈대에 맞추어 살을 붙여내고,

무한한 관계의 연결 속에 자신을 던져놓는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발견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이 나의 직업이었다. 그래야만 우리의 한계를 알고 연민으로 삶을 견뎌낼수 있다. 6)


이전 25화인간, 우주 그리고 코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