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광장에 온 건 우연입니다. 우연이니 만큼 아주 천천히 다가가 저 긴 의자에 앉을 수밖에요. 아무도 날 부르진 않았습니다. 나도 딱히 와야겠다는 마음 없이 거리를 지나다 그냥 무료해서 들렸던 겁니다.
이 도시에 도착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갑니다. 사실 어제까지는, 열세 시간의 버거운 시차와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탔던 노독에다, 계속 강행군으로 이어지는 업무로 너무 지쳐 있었지요. 이제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나니까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모처럼 일이 일찍 끝난 오늘은 거리로 나와 보았습니다. 거리를 실컷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도심 중앙에 있는 이 광장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양팔을 등받이에 걸치니 너무 편해졌습니다. 광장의 저녁 햇빛은 내 나라 여름 햇빛과 별다를 게 없지만, 보도블록 위에 걸쳐있는 오후의 햇빛에선 진한 모래 냄새가 나는군요.
아! 참, 이 도시의 지도를 본 기억에 의하면 여기서 바다가 그리 멀지 않겠네요. 저기 광장에 심긴 늙은 나무들은 그 잎들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굵은 줄기가 두 번이나 굽었습니다. 나무 등걸 옆에 기대어 있는 노인은 이 저녁이 참 좋은가 봅니다. 백 년의 연륜이 쌓여있는 나무줄기에 기대어, 저녁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니 말입니다. 참 신기해요, 노인의 주름진 얼굴 표정과 늙은 나무와 저녁 하늘이 저렇게 잘 어울리니 말입니다.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여름 햇볕 아래, 진한 포옹에 매달려 있는 저기 중년의 두 연인은 아직도 식지 않은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나 봅니다. 말없이 서로 마주 껴 앉은 저 자세가 무척 힘이 들어 뵈는 데도 서로의 감정에 동요라도 일으킬까 봐, 전혀 움직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키스 중인 그 남자와 저의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남자의 눈이 왠지 허망한 눈빛이었어요. 너무 황홀해서 나오는 눈빛인지 아니면, 반복되는 입맞춤이 무료하다는 눈빛인지 잘 모르겠지만 몹시 허전해 보였습니다.
저 중년의 연인들에게 다가가서 더울 테니 저 시원한 나무 밑 벤치로 옮기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사뭇 진지한 자세로 뒤늦게 찾은 애정을 확인 중인 저들 분위기를 보아, 그냥 놔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오후 내내 거리를 돌아다닌 탓에 몸이 점점 무거워집니다. 내 나라에선 공원 같은 곳에서 대낮에 졸고 있으면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여서 적잖은 흉이 되겠지만, 지구 반대쪽에 있는 이 나라에서야 흉 잡힐 일은 아니겠지요.
사람들의 부산한 발자국 소리에 막 잠이 깼습니다. 사실은 눈감고 잠이 든 듯했지만, 저녁 햇살이 기울며 어둠이 다가오는 환영은 망막에서 어렴풋이 그려지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불현듯 어둠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싶어 눈을 뜬 순간에는, 여기가 내 나라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 앞 조그만 놀이터 공원인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여기가 어딘지 기억해 내느라 망연해하고 있었죠. 아직 이곳이 내 모든 감각에는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나 봅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광장 안의 거대한 고목들에 둘러싸인 광장에 어느덧 어둠이 밀려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곤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장에 북적거리기 시작했어요. 마치 저녁 축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곤 연이어 광장 곳곳에서 집시들이 나타나 거리 공연을 펼치기 시작했죠. 저도 더 이상 앉아있는 게 멋쩍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기 초여름의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다 떨어진 두터운 코트를 입은 저 노인은 바이올린을 켜고 있습니다. 구경꾼이 별로 없는데도 아주 신중하게 연주를 하네요. 무슨 곡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몸동작에선 자신이 연주하는 선율에 취해있다는 걸 알겠네요. 동전 몇 푼 얻자고 거리에서 하는 즉흥 연주라 치고는 제법 높은 수준인 것 같습니다.
아! 저기에선 무언극을 하네요. 채플린의 팬터마임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어른들 손에 잡힌 꼬마 몇 명이서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군요. 그리고 저긴 청년 둘이서 횃불을 돌리는 묘기를 보여주는데 여기까지 횃불에서 나는 연기가 후끈하게 전해져 옵니다.
광장 한가운데선 소년들 대여섯이 바닥에서 몸을 뒹구는 브레이크 댄스 춤을 추고 있습니다. 또래의 친구들이 곁에 많이 모여서 환호를 하는군요. 이제 광장 전체가 몹시 들뜬 것 같으면서도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한가히 걸으며 구경하기에는 아주 좋은 분위기입니다.
'마리오'를 만난 건, 웃옷을 벗어 젖힌 육중한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격파 기술을 보이고 있는 앞에서였지요.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사내는 쉴 새 없이 알아듣지 못할 큰 소리를 내지르면서, 간헐적으로 자기 앞에 있는 각목과 벽돌, 병 같은 것들을 손과 머리로 부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위험한 동작보다는 그가 쉰 목소리로 무언가 토해내는 대사를 흥미 있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옆에서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로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외국 관광객끼리 서로 얘기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는데, 계속 내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힐끗 돌아다보니 키 작은 한 청년이 좀 빠르다 싶은 영어로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바 차림의 이 청년은 스페인과 원주민의 피가 섞인 이곳 혈통 중에도 다소 원주민 쪽을 많이 닮은 듯하게, 검은 머릿결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다소 왜소한 체격 탓에 좀 앳되어 보였습니다.
"어디서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 칠레에서 그리고 이 광장에서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마리오라고 합니다. 슈퍼마리오라는 컴퓨터게임 아시죠? 그 게임을 생각하시면 쉽게 마리오를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저기 머리로 맥주병을 깨는 저 사내는 일 년 전에 마누라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한 통에, 밤마다 저렇게 나와 위험한 짓을 하면서 울분을 삭이고 있답니다. 위험하니 다른 일을 하라고 주위에서 만류해도, 이 짓을 그만두면 미칠 거라고 하며 매일 밤 저렇게 나와서 마구 부수고 있습니다. 저 짓 하기 전에는 마약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저 짓을 해서라도 마약을 끊어 다행이죠."
'마리오'는 묻지도 않는 말을 연이어하더군요. 그리곤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를 묻고는 자기는 전 세계 동전을 수집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자기로선 생애 처음으로 만나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며, 내 나라의 동전 하나를 기념으로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영광이겠다라고 얘기합니다.
(다음 주에 마지막 2편을 올립니다.) *Cover image generated by Open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