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를 데리고 광장 근처 허름한 맥주 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목이 말라서 맥주 한 잔 하고 싶은데 어디가 좋을지 모르겠다, 아는 곳이 있으면 안내 좀 해달라고 했죠.
청승맞게 남의 나라 술집을 혼자 기웃거리는 것보다야, 내가 한 잔 사는 한이 있더라도 영어를 곧잘 하는 이곳 토박이 젊은 친구를 말벗 삼아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낫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좁은 맥주 집에는 대여섯 테이블에 중년 남녀들이 각자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껄껄대며 농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맥주를 사 들고 구석의 낡은 나무 탁자에 앉았죠. 술집 구석 벽에 걸어놓은 티브이에서 영국에 감금된 독재자 '피노체트'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심장병이 악화되어서 오늘 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져 카운터에서 큼지막한 쿠키를 사 왔습니다. 이 걸로 저녁을 대신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목이 탔던 탓인지 맥주가 아주 시원하더군요. '마리오'는 술을 잘 못한다 합니다. 자기는 한 병이면 족하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한 병 더 마셔야 했습니다.
'마리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적잖게 놀랐어요. 이 친구의 해박한 지식과 그의 뛰어난 기억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녁시간에 광장을 돌아다니며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말을 걸어 동전 수집을 하는 건달 같은 청년이 이렇게도 세상 물정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리오'는 내가 처음 만나는 나라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이미 우리나라에 대해 아주 상세히 알고 있더군요.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나라에 대해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해 보겠다며 늘어놓은 얘기가 뭔지 아세요? 정확한 대통령 이름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정당들 다툼과 분단국으로서 이웃 나라와 관계가 어떠하며, 독특한 전통문화와 음식, 심지어 국민들이 좋아하는 스포츠가 무엇인지 줄줄이 읊더군요. 마치 나를 만나기 위해 미리 우리나라에 관한 공부를 해놓은 것처럼, 아주 해박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는 가난한 집 막내아들로 자라서 어렵게 중학교로 학업을 마쳤지만, 그다음부턴 저 혼자 부단히 책을 보며 독학을 했다고 하는군요. 영어는 광장에서 만나는 북미나 유럽 관광객을 붙잡고 억지로 말을 걸면서 배웠답니다. 요즘은 매일 밤마다 CNN 뉴스를 빠짐없이 보고 있어서 영어도 익히고 세계가 돌아가는 정세도 두루 섭렵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관해서도 이렇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빈속에 거푸 맥주 두 병을 마시니 제법 취기가 올랐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맥줏집 안에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드나드는 사람들 몇 명이 이쪽을 보고 '마리오'에게 손을 한 번씩 흔드는군요. 광장 근처에선 '마리오'가 제법 알려진 청년인가 봅니다. 티브이에서는 뉴스가 끝나고 칠레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습니다. 일상사가 소재인 가족 드라마 같군요. 한국에서도 흔히 보는 뻔한 줄거리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마리오'가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자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 친구가 뜨겁게 좋아하는 여자는 자기가 중학교 다녔을 때 그 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네요.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위랍니다. 지금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데, 재작년에 결혼했는데 곧 이혼을 하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하루도 이 여자를 잊은 적이 없다고 하는군요.
그녀를 짝사랑한 다음부턴 자기 또래 여자들은 결코 눈에 들어오질 않더랍니다. 이 말을 강조해서 그런지 그의 짝사랑이 더욱 집요해 보입니다. 뭐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가끔 있는 일이겠지만, 막상 먼 나라에서 이런 짝사랑 이야기를 들으니까 새삼 울컥하더군요.
제가 물었지요. 사랑을 고백했냐, 만약 고백을 받아주면 같이 살 용기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직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 했다고 하는군요. 너무 두렵다는 겁니다.
자기의 사랑을 거부한다면 자기의 삶이 견뎌 나질 못할 것 같고, 만에 하나 그녀가 자기의 사랑을 받아줘 같이 살게 되면 자기의 뜨거운 사랑이 점차 식어버릴 것 같아 겁나서, 감히 고백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나요.
자기가 이런 역설적인 사랑에 빠져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헤어나질 못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자기가 갖고 있는 게 혹시 사랑이 아닌 허구인가를 자주 반문하고 있답니다. 이 청년이 애처로우면서도 한편 그 열렬한 사랑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술집이 붐비며 조금씩 소란스러워져서 그만 나가자고 했지요. '마리오'도 서슴없이 따라나섰습니다. 그래서 우린 골목을 돌아서 다시 광장으로 왔어요. 광장은 한 밤이 되면서 더욱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딘가 광장이 군중들의 열기에 들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광장 한쪽이 소란스러워 '마리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았습니다. 아까 '마리오'를 처음 만났던 그 자리였죠. 광장에서 이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아마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일 겁니다.
구경꾼들을 헤집고 들여다보니까 차력술을 보이던 그 육중한 사내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울고 있더란 말입니다. 남자들 몇 명이서 사내 옆에 앉아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뭐라고 하는데 야단을 치는 건지, 위로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마리오'가 그중 한 명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옆에서 사내의 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머리에 수건을 묶어주고 있습니다.
사내가 옛 부인에 대한 증오를 토하면서 차력술을 선보이고 있을 때, 문득 구경꾼들 틈에서 도망간 부인의 정부[情夫]를 발견했다 하더군요. 그래서 재빨리 그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서 그 여자의 행방을 물었다는 겁니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이 이 여자가 바람 끼가 너무 많아 내쫓았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고 합니다.
내쫓긴 했지만 막상 혼자 지내려니 외로워 혹시 옛 남편에게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이곳을 기웃거리던 중에 이 사내의 눈에 띄었던 겁니다. 이 사내는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지만 자기를 떠난 부인이 그나마 딴 남자에게도 정착을 못하고 여전히 떠돌고 있다는 말에, 쏟아지는 슬픔을 참다못해 괴성을 지르고는 '죽어 버리겠노라'면서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여러 번 부딪혀 실신했다가, 지금 막 깨어나는 길이라고 합니다.
설명을 마친 '마리오'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길이, 당신은 도망간 여자에 대한 이 사내의 이렇게 간절한 사랑을 이해하겠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피를 흘린 사내가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가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떠나서 점차 정적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오'에게 내일 이 도시를 떠나야 하는데, 내일 아침에 이 광장에서 만날 수 있겠느냐 물었죠. 왠지 오후 내내 머물러 있던 이 광장의 아침 정경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호텔 가방에 있는 우리나라 동전을 '마리오'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밤에 '마리오'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과연 사랑 고백을 하는 게 옳은지를 곰곰이 따져 보고, 다시 만나서 내 나름대로 충고도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꾸린 짐을 프런트에 맡기고, 광장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한동안 걷다 보니 등에 땀이 나는군요. 밤새 초여름의 열기가 식기는 했지만, 도로 위에 가라앉은 공기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습니다. 오고 가는 차들만 없다면 조용하고 산뜻한 아침을 맞을 것 같은데, 가끔 지나가는 차들의 매연으로 공기가 조끔씩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간밤에 깊은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몸이 여전히 무겁지만 머리는 제법 맑아졌어요. 아마 이곳 일을 모두 마치고 떠나니 홀가분한 데다가, 모처럼 맛보는 시원한 아침 바람 때문이겠죠. 저기 광장에는 벌써 청소부 몇 명이 나와 청소를 하는군요. 그중 한 명은 긴 호스를 끌어다 화단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어요. 건조한 기후라 공공장소에 심은 잔디에는 저렇게 아침마다 저렇게 물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물방울에 젖은 아침 잔디가 아주 생기 있어 보입니다.
혹시 벤치가 이슬에 젖었을까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이 자리는 어제 중년 연인 둘이 앉았던 자리였습니다. 두 연인의 진지한 포옹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군요. 그리고 어제 키스 중에 나와 마주친 그 남자의 공허한 눈빛도 오래 기억날 듯합니다.
그 둘은 지금 잠자리를 같이하고 있을까 모르겠어요. 어떤 자세로 포옹하고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둘이 같이 마주 앉아 껴 앉고 있는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에 각자 떨어져 있는 모습이 그려지질 않습니다. 둘은 영원히 그 포옹하는 자세로 살아갈 것만 같습니다.
아! 이제 저기 '마리오'가 오네요.
아침 인사 후, 준비한 내 나라 동전들을 꺼냈습니다. 많이 주면 모처럼 구한 동전의 희소가치가 떨어질 테니까, 액수 별로 해서 모두 네 개를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어제 나와 시간을 같이 해 준 대가로는 조금 약소한 듯해서 쑥스럽더군요. 어제 잘 들어갔느냐고 합니다. 가끔 택시 운전사들이 터무니없는 요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 보내놓고 내심 걱정을 했다는군요.
그리고 동전을 고맙게 받겠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자기가 수집하는 스물여덟 번째 나라의 동전인데 여태껏 받은 동전 중 제일 가치가 높겠다고 하면서 웃는군요. 자기가 동전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마치 가본 것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고, 가끔 동전을 보면서 그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할 때가 있다 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나라의 동전을 다 수집하면 그땐 이 광장을 떠나겠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여자가 그때까지 이 광장 근처에 계속 머물러 살고 있다면 말이죠.
내가 먼저 광장의 탑시계를 보면서 이제 작별을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몇 년 후에라도 이곳에 올 기회가 있으면 이 광장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는데, 말을 마치고 나서 곧 후회했습니다.
다음에 내가 다시 이 광장에 왔을 때, 이곳에 '마리오'가 없어야 그에게 다행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으니까요. '마리오'가 그 여자에 대한 집요한 짝사랑으로, 그리고 또 도저히 불가능한 모든 나라의 동전 수집을 위해 이 광장에 계속 머무는 것은, 젊은 그에겐 큰 불행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마리오'에게, 사랑하는 그 여자에게는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왜냐고 묻더군요.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날 걸 대비해, 차라리 그 일방적인 사랑이 식기를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하고 그냥 모르겠다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마리오'의 그 열렬한 짝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며, 또 그의 덧없는 사랑을 반전시킬 만한 더 젊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그 앞에 나타나리라는 장담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오'는 내 눈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시계탑으로 시선을 돌렸어요. 마지막으로 우린 이곳 관습대로 이별의 짧은 포옹을 했습니다. '마리오'의 몸은 광장의 아침 공기에 젖어 차가웠습니다.
이제 서둘러 광장을 나서야겠습니다.
저기 저렇게 동전을 들고 물끄러미 서있는 '마리오'라는 청년을, 그가 언제까지 머물지 모를 '마리오'의 광장에 남겨두고서.
[0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