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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별 May 30. 2023

그건 아빠의 상처잖아요

기쁜별의 유년 에세이3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던가? 매달 아빠가 다달 학습을 사주셨다. 그 문제집은 국어, 산수, 사회, 과학 등 대부분의 과목이 모두 있었고, 맨 뒤에는 그달의 모의고사가 붙어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아빠는 그 모의고사를 풀도록 했다. 주말 점심을 먹고, 아빠가 방으로 불렀다. 아빠는 낮잠 주무시듯 누워계시고 그 옆에서 시험을 치렀다. 시간 맞춰가며 몇 과목을 봤다. 끝나면 채점도 스스로 하게 했다. 빨간 색연필을 들고 답지를 맞추다 보면 유혹에 빠진다. 이건 내가 조금 착각해서 그런 건데 맞다고 할까? 이건 내가 마지막에 바꿔쓴 건데 아쉽다. 처음에는 솔직하게 채점하다 틀린 갯수가 많아지면 적당히 타협했다. 당시 아빠는 90점 이상이면 상으로 오백 원을 주셨고, 70점보다 낮으면 손바닥을 가볍게 때리셨다. 70점보다 낮고 싶지 않았다. 대략 계산해서 그보다 낮아질 거 같으면 틀렸지만 맞은 것으로 할 때도 있었다.



주말 모의고사 시간이 힘들었다. 아빠와 단둘이 시험 치는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무릎 꿇고 밥상 앞에 앉아 문제 푸는 시간이 하염없이 길었다. 틀리면 어떡하지? 아빠가 실망할까 걱정되었다. 채점하면서 틀린 것을 맞는다고 할 때도 마음이 복잡했다. 거짓말인데 괜찮을까? 맞았다고 하자. 지금 알았으면 된 거지. 두 개 마음이 오고 갔다. 일 년도 채 안 했는데 저 기억은 오래 남아있다.



공부는 혼자 하는 거라는 철학에 맞춰 우리도 그렇게 키웠다. 초등학교 때는 혼자 문제집을 풀도록 했다. 초등학교 때는 영어를 듣고 따라 하도록 했다. 중학교에 가서는 영어사전 찾는 법, 발음 기호 익히는 법도 본인이 알려줬다. 영어는 읽고 해석하고 다시 그대로 쓸 수 있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공부하도록 했다. 공부에 관한 모든 방법은 아빠에게서 나왔다. 공부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빠뿐이라 아빠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아빠와 나눈 대부분 이야기는 공부였다. 절대적으로 공부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다른 이야기는 숨겨져 찾기 어렵다. 아빠를 떠올리면 공부'만 생각난다. 주로 아빠가 말하고 우리는 듣는다. 공부에 대한 방법이나 문제에 대한 설명 혹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 혹은 꾸중. 그렇게 아빠는 내게 공부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서울대에 갔으면 했다. 아빠가 바라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성적표는 서울대와 멀었고 아빠 앞에서는 작아졌다.



할머니가 들려줬다. 아빠의 서울대 도전기를. 차남이라 서울대가 아니면 대학을 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몇 년 간 서울대 간다고 준비했는데 성적이 부족해 못 가셨다. 군대에 다녀와서 생계를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고 아빠 공부는 끝났다. 할머니 성화에 늦게 장가를 갔다. 아이가 태어났고 본인이 못한 공부를 실컷 하게 해주고 싶었다. 본인에게는 간절했던 공부이니 마음껏 지원해 줬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고마워하지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억지로 억지로 끌려왔다. 아빠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살아보니 공부 잘해서 좋은 직업을 구한 주변 사람들이 편하게 사는 것을 보니 포기할 수 없었으리라.



공부를 강요한 아빠를 오랫동안 미워했다. 공부 못해서 주눅 든 시간이 아팠다. 공부가 아빠와 나 사이를 멀게 만든다고 느꼈다. 아빠가 서울대를 못 가서 그 한을 우리에게 푼다고 생각했다.



© aaronburden, 출처 Unsplash



어릴 적 친구들과 고무줄놀이하고 작은 돌멩이를 가득 모아 공기놀이할 때 아빠는 집에 들어와 누워 계신 적이 종종 있었다. 집 앞 마당에서 노는데 방에 있는 아빠를 기억하는 이유는 시끄럽다며 딴 데 나가서 놀라고 소리치셨기 때문이다. 아빠가 오면 우리 집은 놀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아이들과 다른 집으로 가서 놀았더랬다. 어린 내게 아빠는 신경질 내는 사람, 짜증이 많은 사람이었다.



잠자리 바뀌는 것도 싫어한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엄마 아빠 결혼 때다. 그 당시 엄마가 먼저 시댁으로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처가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이 혼례 절차였단다. 아빠는 낯선 처가에 갔다가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엄마만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 기가 차서 이 결혼을 해야 하나 고민했단다. 다시 아빠가 엄마를 데리러 와서 사과를 했고, 두 사람은 시댁에 들어와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빠는 계속 태어난 곳에서 지금까지 살고 계시는 거다. 결혼하고도 처가에 가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이다. 내 어릴 적 기억에도 엄마랑 우리들만 갔었지, 아빠랑 간 기억은 없다.



할머니가 걱정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아빠였다. 누가 아픈 것을 특히 싫어했다. 할머니는 무릎 아픈 것이 기본이었고, 감기도 걸리셨다가 소화가 안되기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병원에 안 간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작은 병 그냥 넘기다 큰 병 된다며 그럼 돈이 더 든다고. 아빠가 소리쳐서 더 아플 것 같았다.



30대 중반, 고졸, 개인 사업체 운영, 자녀 4명,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사는 한 남자. 일하다가도 한 번씩 머리가 어지러워 집에 와서 쉬어야 하는 사람.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데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 예민해서 많은 것이 거슬리고 신경 쓰이는 사람. 자꾸 몸이 아프다. 공황장애인가? 지켜야 할 가족이 많은데. 필사적으로 공부를 한다. 몸에 대해서 건강에 대해서. 먹는 것을 바꾸니 조금 좋아진다. 운동하는 습관도 기른다. 조금씩 더 나아진다.



아이 네 명을 보고 있으니 좋기도 하고 욕심도 난다. 내가 못한 공부 실컷 하게 해주고 싶다. 혹시 아나? 내가 못 간 서울대 가서 정말 멋진 인생을 살지도.



아빠가 강요했다고 생각했는데, 바람이라고 바꿔 생각하는 순간 머리가 띵 해진다. 아빠의 상처잖아요! 하며 소리치고 싶었는데 본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일렁인다. 부모가 되니 알겠다. 부모도 흔들리는 한 사람임을. 어릴 때 부모는 완벽하다 생각하며 컸다. 크면서 그들 약점이 보이면서 미워하기 시작했다. 못마땅했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간 받은 것들까지 다 부정하면서 마음속으로 멀어졌다. 아빠는 그대로인데 내 마음만 멀리 갔다.



글을 쓰면서 아빠가 아닌 한 사람으로 다시 보니 세상 멋진 사람이다. 할머니가 한 번씩 말씀하셨다. "느그 아부지같이 야문 사람이 없다." 동의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라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이제는 그 말 의미를 알겠다. 아빠는 호두 알같이 야문진 사람이다. 자녀 교육도, 본인 건강도 살뜰하게 챙겼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사업체를 계속 이어가고 계신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고 계시다.



내 앞에 멋진 멘토가 있고 스승이 있었는데 멀리 찾아다녔다. 다행이다, 너무 늦진 않아서.


© derekthomson,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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