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노동은 왜 생겨났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우위를 점했는가.
이 책은 가짜 노동이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여러 사람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가짜 노동을 멈추고 근무시간을 줄이고 더욱 인간답게 사는 것에 투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시한다.
첨단의 기술은 시간과 수고를 덜어주지만 우리는 왜 아직도 바쁠까. 완전한 전자결재 시스템으로 무장한 프로그램과 엑셀이라는 무기가 준비되었고, 이 시스템은 많은 일에서 실수를 줄이고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나는 종종 초과근무를 하고, 주말을 일터에서 보내기도 한다.
편리한 업무 수행을 위해서 자동화시스템이 필요하고, 자동화시스템을 잘 이용하기 위해 계량화된 정보를 입력해야 한다. 개별적이고, 수량화하기 어려운 업무도 분명 존재하지만 또 그것을 명료하게 처리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탄생시킨다. 이 수고로운 과정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시스템을 잘 이용해야 하므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기술을 배운다. 그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익숙해질 만하면 ‘업그레이드’, ‘차세대’, ‘2.0’ 이런 수식어를 달고 새로운 버전이 등장하여 시스템을 익혀 이제 좀 쓸 만한 우리에게 또다시 무지에서 오는 좌절과 혼란을 던진다.
기존의 것은 ‘지혜’라는 말로 보기 좋게 포장되어 강요되고 익숙한 사람에게는 안도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기이함을 주고 있다. 그러고는 영원히 이를 이해할 수 없는 도랑으로 빠지고 마는 것 같다. 처음의 내가 느낀 기이함은 해소되지 않은 채 익숙해지는 내가 되었다.
사실, 이 책의 내용에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내 업무 중에 많은 부분이 가짜 노동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는 동시에 나 또한 가짜 노동을 생산하는데 동참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리더가 바뀔 때, 아니면 그에 준하는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수많은 보고 자료와 기획물을 생산한다.
새로 수립한 주력 사업을 홍보하는 예쁜 로고나 슬로건은 외부에는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름이나 폰트 등만 바뀌어 차곡차곡 리더의 성과로 쌓인다.
덕분에 각종 위원회 등 외부에서 조직을 평가하는 지표로 삼기 위해 이미 낸 취합자료를 이름만 바꾸어 작성하는 담당자(이유도 모른 채), 재촉하는 중간관리자(이유도 모른 채)는 소중한 수고와 시간을 보여주기 위한 자료 작성과 취합에 쓰느라 본연의 업무를 미루고 서로를 비난하기 일쑤다. 그들 중 누구도 이 업무가 조직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알지도 못하고 의문도 가지지 않는다. 체제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그럴 시간도 없다. 덕분에 조직에 수행해야 할 진짜 나의 업무는 질이 떨어지거나 뒤로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
나의 몇십 배를 버는 그들의 가독성을 위해 이미 시스템에 있는 사항인데도 명료한 보고서를 만들고, 그들의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 받은 만큼 일하기도 버거운 실무자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그중 얼마는 진짜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실무자는 구분을 할 수 없다. 아니 선별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런 실익이 없다. 그걸 판단하여야 하는,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리더의 대부분은 희생 위에 성과를 세우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물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때로는 원칙과 그 원칙을 지키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업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강조하는 ‘가짜 노동’에 대한 비판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억하거나 생각할 문장들]
#1.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해 줘야 하는 신기술은 사실상 우리를 점점 더 옭아매왔다. 세탁기로 많은 양의 빨래를 빠르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집안일이 더 편해지고 여가시간이 늘어나야 했지만, 실상은 어떤가?
#2. 가속화에는 역설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리라 기대했던 기술은 결국 더 많은 일을 만들어냈다. - p108
#3. 늘 ‘아니요’라고만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노동을 더욱 얄팍하게 늘리기만 하는 강압적 긍정성에 한몫 보태지 않으면서, 예의 바르고 친근한 동료가 되는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 긍정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분별 있게 행동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화려한 최신 용어로 포장된 유리병에 담긴 곤죽 상태의 이유식을 다른 이들에게 떠먹이지 않는 건 우리의 시민적 의무이다.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