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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Oct 03. 2019

낭만도 학습이 될까요?

미드나잇 인 파리


미드나잇 인 파리

낭만도 학습이 될까요?




여행자들과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런던 파, 파리파(대부분의 유럽 여행자들은 영국과 프랑스를 나누어 본인의 취향을 이야기하곤 한다. 웬만해선 두 곳 다 좋아하긴 어렵다나.)로 취향이 나뉘게 된다. 저마다 본인이 택한 도시의 매력을 줄줄이 나열하는데 희한하게 파리는 '낭만'이란 단어를 빼놓는 사람이 없었다.


'낭만의 도시, 파리'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파리를 설명할 때에 낭만이란 단어를 빼놓지 못한다. 그 단어 하나로 파리의 모든 것을 이해시킬 수 있으니, 나 역시 구태여 또 다른 꾸밈말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찾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내 단어의 폭이 좁은 탓을 했다.



copyright 2014. 동경(insta@id1992) all rights reserved. [프랑스/파리]



시간이 흐르고 파리를 다녀온 지 4년쯤 지난 어느 날, 지인들의 파리 여행기를 듣다가 여전히 파리에는 낭만이란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불현듯 그 낭만은 어디서 오게 된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수십, 수백 년 전 파리를 사랑한 누군가의 눈과 입을 통해 파리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와 몇 세기가 지난 지금의 우리는 그가 의도한 대로 '낭만적으로' 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홍색은 여자 아이의 색이라 배운 것처럼, 결혼은 여자와 남자가 하는 것이라 배운 것처럼, 마치 원숭이 하면 바나나가 떠오르듯 아주 오랜 시간 주입식 교육을 받은 건 아닐까, 하는 다소 삐뚤어진 의문 말이다.



copyright 2014. 동경(insta@id1992) all rights reserved. [프랑스/파리]



지극히 개인적인 파리의 단상. 쌈짓돈을 모아 떠난 첫 배낭여행의 벅찬 마음은 잠시 거두고 조금은 건조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볼까. 


지하철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고장이 나거나 파업의 여파로 멈추고, 그 안에는 시골쥐 도시 쥐, 방금 퇴근한 라따뚜이 할 거 없이 뒤섞여 지내곤 했다. 수하물 무게 제한을 겨우 면한 22kg의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때 만난 사내는 선뜻 내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얼마 안 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알게 했더랬지. 도시 곳곳에선 악취가, 그늘마다 널브러져 있는 부랑자의 모습은 밤이고 낮이고 여행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이 세상에는 '파리'를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압도적이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가이드북까지 소개되는 소매치기와 강매단의 명성은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그들에게 내 물건을 훔침 당하고도 칠칠치 못한 내 탓을 해야 하는 이곳의 여행 문화에서 낭만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저 파리는 파리니까. 어느 스타처럼, 어느 브랜드처럼 파리는 어쩌면 그 이름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유가 되는 곳인 걸까.



copyright 2014. 동경(insta@id1992) all rights reserved. [프랑스/파리]



사실 여행을 하다 보면 파리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알려진 여행지는 모두 저마다의 제목이 있다. 우리는 그 제목을 마음에 품고 기대하며, 내 나름의 상상을 펼친 후 그곳에 발을 디디곤 한다. 내가 파리에 품은 의문과 같은 맥락의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간 내가 그려온 모습과 현실이 보기 좋게 맞물릴 때에 그곳은 소위 인생 여행지가 되지만, 반대의 경우 혼란스럽기 짝이 없고 어디 가서 말을 꺼내기도 멋쩍다. 내가 상상한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정작 마주한 풍경은 다른 의미의 꿈을 꾸는 것만 같을 때. 



딱히 낭만스럽지 않은 풍경을 구태여 낭만이라 포장하고 이곳을 위해 들인 시간과 돈을 위로하며 밤을 지새울 때, 나는 마치 세기의 찬사를 받은 어느 작품 앞에서 하품을 쩍쩍하는 스스로의 교양을 탓하며 난해한 예술의 세계를 이해하려 애쓰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copyright 2014. 동경(insta@id1992) all rights reserved. [프랑스/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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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냉정한 말로 여행은 모두에게 특별하지만, 파리는 결코 모두에게 낭만적이지 않다. 우리는 어쩌면 이제는 파리를 여행하기 전에, 우리는 소매치기를 방지하기 위한 자물쇠 보다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인생의 첫 유럽 여행 루트에서 프랑스를 구태여 넣지 않을 권리. 파리라는 도시에서 학습된 낭만을 찾지 않을 자유. 더 나아가 '안타깝다, 그곳 정말 낭만적인데!' 따위의 반응을 가차 없이 무시할 수 있는 용기와 같은 것들 말이다. 꽤나 퍽퍽하게 돌아가는 세상, 낭만마저 학습이 되도록 둘 수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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