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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Aug 29. 2016

어쩌다, 다합 (상)

나는 어쩌다 다합에 오게 되었을까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애초에 세웠던 계획 위에 숱한 우연이 새로이 덮어지면서 홀로 상상하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만들어진 틀 밖의 경계와 규칙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던 이전의 나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여행. 나는 지금 그런 여행을 하고 있다.




눈이 떠질 때 눈을 뜬다. 알람은 사라진 지 오래다. 배가 고프면 밖에 나가 늦은 점심을 먹고 날이 더울 땐 집 앞바다에 몸을 담그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난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지칠 때쯤 햇볕 아래 몸을 말린다. 머리 위에 뜬 태양이 너무 강해 고개를 돌리면 어느 노인과 눈이 마주친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면 그녀도 나를 따라 웃는다. 기분 좋게 돌아누워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가 일곱 시가 되면 모두 모여 저녁을 먹는다. 허기진 배가 가득 차면 카페에 가서 짜이 한 잔을 시켜두고 밝은 달빛에 가려져 희미해진 별을 바라본다. 그렇게 텅 빈 듯 가득 찬 하루가 오늘도 조금씩 지나간다.

 - 5월의 어느 일기 중에서 -



▲ Copyright 2016. 동경(insta@id1992,다합) all rights reserved.






사실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원래의 루트라면 크로아티아 생활을 마치고 발칸을 넘어 바르셀로나로 가서 가족을 만나고 순례길을 걷고 남미에 가야 했다. 그러나 나영석 PD의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어느 날 크로아티아에서 함께 일하던 동생이 한 번 참여해보자는 제안을 해왔고 자연스레 나의 목적지는 스페인에서 이집트로 바뀌게 된 것이다.




기왕 할 거 똑바로 하자는 의지에 불타 최소 4명이라는 신청인원 충원을 위해 스플리트 지점에서 함께 일하던 언니와 두브로브니크에서 영상 공부를 하는 분을 어찌어찌하여 섭외했다. 기 센 누나 셋과 머슴 하나. 나름의 콘셉트도 잡았다. 함께 찍은 사진이 필수라는 말에 각자 유럽 전역을 여행을 하던 우리는 날짜를 맞춰 스플리트까지 모여 사진을 찍고 꽤 그럴싸한 자기소개서도 작성했다. 



신청서까지 완벽히 보내고 나니 왜인지 모르게 출처 없는 자신감의 휩싸인 우리는 (아마 신청했던 모든 참가자들이 그랬을 듯) 받은 1억을 어떻게 써야 할까,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아니야 다음 사람 위해서 적당히 쓰자 등 기분 좋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약 2주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발표날. 우리의 예상대로라면 한국을 출발한 팀이 유럽에 온 뒤에 유럽에서 아프리카에 와야 했는데 (우리의 루트는 동유럽-발칸-아프리카를 잇는 중간다리 루트였다.) 당첨은 고사하고 알고 보니 애초에 신청 방법 자체를 착각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학수고대 하며 신청하고 기다린 것은 서울-유럽 팀이었다.



다른 팀과의 경쟁은커녕 신청부터 실수였다는 생각에 꽤나 짙은 허무함과 약간의 오기 어린 마음이 섞여버렸다. '될 때까지 신청해보자, 언젠간 아프리카 오겠지.' '세계일주인데 아프리카 안 올 수가 없어, 아프리카 시작점인 이집트에 가서 기다리자.(그러나 결국 오지 않았다고 한다..)' 등 팀원들과 여러 가지 플랜 B를 세우다 결국엔,




야 됐어. 나PD가 안 보내주면 우리 힘으로라도 가자. 




하게 된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이집트행 비행기를 결제한 후였고 자연스레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사놓았던 바르셀로나행 티켓은 찢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미 일 년이 넘게 만나지 못했던 가족이었지만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반년쯤 더 기다리는 것은 괜찮겠지.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뭐에 홀린 것처럼 일단 지르긴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계획대로 여행을 한 적이 없다. 어느 날 캐나다에서 친해진 지인에게 이에 대해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니 가만히 듣던 MK는 이런 말을 했었다. 




여행이 계획대로 됐다는 건 니 여행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뭐든 적당한 게 좋지 않을까? 아, 말해 뭐해, 나도 모르겠다. 일단 가고 보자. 그래서 도착한 다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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