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으로서 떠나는 여행
직장인으로서 떠나는 여행
여행에 있어 '지루함'이란 사치
출판사 에디터님과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던 어느 겨울날, 그날이 이스타젯 오사카 항공 특가 날이라는 이야기에 홧김에 결제를 해버린 게 이번 휴가의 시발점이었다. 꽤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로 여행 출발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메일을 받을 때까지 출간에, 저자와의 만남에, 지인들과의 약속과 밀렸던 연애와 게으름에 몸을 맡기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거기에 출장까지 겹쳐 그야말로 눈 떠보니 공항이었던 것이다.
사실 특별한 계획이 있던 일정은 아니었으나 누군가 얼굴을 붉히며 가지 말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니 오기로라도 떠나고 싶은 그런 휴가였달까.
나름대로 근태관리 착실히 하며 연차, 월차 넣어두고 일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입사 후 첫 휴가가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지금은 당시 다니던 회사에 퇴사를 했다.) 내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대략 사흘가량의 업무를 미리 준비하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기념품까지 챙겨가며 휴가를 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왕이면 오래도록 모르고 싶었는데. 다 그런 거야, 사장도 쉬고 싶을 때 못 쉬어, 서로 생각해야지 따위의 말을 위안이라고 되뇌며 살고 싶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빠른 시일에 알게 되어 다소 유감이다.
그리하여 나는, 긴 여정을 마친 후 처음으로 퇴사자 혹은 여행자가 아닌 그저 휴가를 낸 직장인으로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일본의 교토.
오늘이 아니어도 내일이 있는 하루가 반복되며 쉽게 권태를 느끼던 그때, 1분 1초가 아쉬워 두 눈 밝히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여행자들의 설렘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화라는 화는 다 내놓고 갑자기 불러내서 10만 원 돈 건네주며 미안하다는 대표님과, 홀로 남아 남은 업무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 대리님을 뒤로하고 쫓기듯 떠난 이번 여정은 그다지 설레는 여행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휴대폰 데이터를 잠시 꺼두는 것에 해방감을 느끼고, 볕 좋은 카페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책을 보다가 대낮에 길거리를 거닐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 내가 떠나왔음을 증명했다.
여정의 시작이 어떠했건 간에 직장인으로서의 여행은 퇴사 후 떠났던 세계일주와는 분명히 달랐고, 평소 잘 쓰지 않는 표현을 빌어 아주 달콤하기까지 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땅에서 밥 한 끼 먹자고 손짓 발짓을 다 쓸지언정 그곳은 마냥 편안하기만 했고 더 나아가 그저 걷다가, 커피를 마시고 또다시 걷는 게 전부인 이 단조로운 나날이 한동안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게 평온한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강가에 어느 카페에서 가만히 앉아 그림을 그리는데 이따금씩 휴가를 얻기 위해 달렸던 지난 3주의 기억들이 나를 계속해서 재촉했다. 다리는 퉁퉁 부어 움직이질 않는데도 머릿속에는 어느 만화처럼 온통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부지런 세포들의 외침이 계속됐다.
벌써 5시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그리고 나는 결국 그 카페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걸었다.
툭하면 찾아와 사람을 흔들어놓던 그날의 권태는 어쩌면 장기 여행자들의 특권이었나 싶어 그립기도 하다가, 한 끼 식사에 맥주를 곁들이는 것이 사치였던 그때와 달리 지루함이란 감정이 사치가 된 지금이 꽤나 재미있다가, '귀찮은데 내일 할까' 하던 것들이 '이럴시간 없어'로 바뀐 것이 사뭇 구슬퍼졌다.
편하게 살기 위해 일을 하다 잃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쓰며, 며칠간의 휴식을 위해 며칠간의 하루를 통째로 갈아 넣고, 결승선 너머까지 달린 후에도 그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뛰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적잖은 회의감을 느낀 '직장인으로서 떠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