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을뿐
싫어하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을뿐
지하철에서 느끼는 인류애의 상실
그토록 돌아오고 싶던 한국, 그립고 그리웠던 멀끔한 행색(?)을 하고 나는 매일 아침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요즈음 나의 기분은 바로 이곳에서 결정된다. 여유 있게 일어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을 탔을지언정 그 네모난 열차 안이 몰상식한 상황들로 가득 차 있다면 나의 하루는 가볍게 망가진다. 반대로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일어나 허겁지겁 지하철을 탔더라도 그 안의 상황이 기본적인 예의에 맞춰 돌아갈 때에는 나의 마음은 한 없이 편안해진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이 싫으면 내가 차를 사서 떠나는 게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법당 안에서 가만히 염불 잘 외우던 중 옆에 종교 화합이랍시고 찬송가 트는 타 종교인들이 나타난다면, 그래도 중이 떠나야 하는 게 맞을까? 사정없는 사람 없고 이유 없는 행동 없다고 한들 그러한 것들을 옷깃 한 번 안 스쳐본 내가 사람 사는 세상이기에 그런 것이라 자위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네모난 한 량의 지하철 안에서 인류애가 상실되는 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예를 들어 나는 내 1인분 몫을 내고도 0.5인분 어치만 앉아야 할 때, 심지어 내가 불편해하는 걸 상대가 알까 봐 걱정해야 할 때, 옆에 앉은 남자의 팔꿈치가 내 옆구리와 가슴 그 어느 중간을 계속해서 찌르면서(그걸 본인이 모를 리가 없는데) 도리어 날 예민하게 바라볼 때, 환승역 계단 코너에서 휴대폰을 하느라 느리게 걷는 사람 때문에 스텝이 꼬일 때, 차례대로 줄 서있는 사람들을 가볍게 무시하고 맨 앞사람의 옆에 자연스레 서는 사람을 바라볼 때, 내리면 타라고 그렇게 알려도 곧 죽어도 먼저 타고 보는 사람들에게 적잖이 건장한 내 몸이 밀쳐질 때, 불규칙적으로 역한 입냄새를 풍기는 사람 때문에 덩달아 입으로 숨을 쉬어야 할 때, 핑크석에 앉은 사내와 그 앞에 서있는 임산부의 신경전을 바라봐야 할 때, 본인의 짐 가지로 타인을 강타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때, 모두가 곤두서 있는 만원 열차에서 냅다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사람을 바라볼 때, 방금 산에서 내려온듯한 차림의 어르신들의 목청 좋은 노랫소리와 유교적 도리에 대한 강요에 난감할 때, 지하철 한 량의 끝에서 끝을 미친 듯이 달리는 아이를 보고 '아이는 원래 저렇게 큰 거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조부모와 지하철 승객들의 온도차를 느낄 때, 온전히 본인을 위해 선택한 옷차림에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강하게 박힐 때, 나는 수없이 인류애와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하여 의심하며 혀를 내두르고 만다.
한마디로 사람에게 정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말이 통하지 않을 때마다 물 없이 고구마 오만개 정도는 삼킨 것 같이 답답했는데. 그래서 그토록 내 나라 언어를 쓰는 이곳에 오고 싶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같은 언어를 쓰기에 고통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당연히 안고 살아야 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며, 불편한 시선을 내던지는 사람들을 예민한 성향으로 매도하고 유난이라 질책하며 그렇게 하나하나 걸고넘어지면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인류에 대한 사랑을 거두고 살아갈 것이라 매일 아침 다짐한다.
아, 싫어하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