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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Apr 20. 2024

사자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게

그림책 <사자는 사료를 먹지 않아>를 읽고

  개도 고양이도 안된다는 엄마 아빠의 말씀에 말 잘 듣는 아이 클레망스는 사자를 집에 데려온다. 클레망스는 사자에게 볼일 보는 것을 가르쳐주고, 산책도 시킨다. 하지만 사자는 클레망스의 말을 듣지 않고 남의 차에다 배변을 하고, 플라타너스와 빨간 신호등에 발톱 자국을 내면서 달렸지만 어쨌든 클레망스는 자신이 데려온 사자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자에게 먹일 사료를 사려고 돈을 쓰지는 않았다. 사자는 알아서 먹이를 찾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클레망스는 책을 보거나 꽃을 보거나 다른 방향을 바라보면서 사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고 급기야 꼭 잡고 있던 사자의 붉은 목줄을 놓쳐 버린다. 사자는 클레망스 없이도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니고 그 사이에 정육점 주인아저씨, 출근하는 사람들, 연주하는 사람들, 왕, 클레망스의 친구들, 친구들의 엄마 아빠, 동네 사람들까지 없어지고 결국 클레망스와 사자 단둘이 남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클레망스의 상황 판단력이다. 사자가 나타나면 혼비백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자에게 친절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사자와 놀면서 걱정 근심을 다 잊어버린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사자는 음악도 좋아하고 예의도 바르고, 친구들과도 즐겁게 논다고 생각하고, 급기야 동네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왜 사라졌는지 그냥 이상하다고만 하는 클레망스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 이 아이는 지금 회피하고 있구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순간, 이 모든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있구나.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구나. 어찌할 바를 몰라 맹렬히 맹렬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구나.


  사자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는 클레망스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 또 한 번 흠칫 놀란다.

  나도 클레망스처럼 회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일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회피와 마주친다.

  시험기간이 되면 왜 그렇게 책상 정리가 하고 싶고, 과제 제출 기한이 코앞에 다가올수록 평소에 보지 않던 드라마가 쓸데없이 재미있고, 당장 처리해야 할 A 업무보다 B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가 더 떠오르고, 치과 가야 하는데 덜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어려운 말을 꺼내야 하는데 엉뚱한 소리만 하고, 청소해야 하는데, 운동해야 하는데, 공부해야 하는데,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사과해야 하는데, 결정해야 하는데,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회피'란 어떤 일이나 상황에 대하여 직접 하거나 부딪치기를 꺼리고 피하는 것을 이른다. 대개 힘들고, 어렵고, 귀찮고, 두려운 종류의 일이나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면 회피는 인간의 본능이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고, 어렵고, 귀찮고, 두려운 것을 좋아할 리 없으니까. 일상 속 자잘한 회피는 당연하고, 반복되고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나의 몫으로 남는다.


  회피가 다 당연하고 괜찮은 걸까?

 

  다시 그림책으로 돌아가보자. 둘만 남은 클레망스와 사자는 숨바꼭질을 하고, 술래였던 사자가 클레망스를 찾아내어 결국 간식을 푸짐하게 먹었다. 그 순간에도 클레망스는 사라진 친구들을 만나서 기뻤다고 한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땐 잔혹동화의 한 장면 같아서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나의 수많은 회피가 쌓여서 나의 수많은 미룸과 비겁함이 쌓여서 결국 내가 나를 망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다 부딪치고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회피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아보아야 한다. 회피를 통해 내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면, 그리하여 종국엔 나를 진정 해치는 일이 된다면 다시 생각해 보고 행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많이 두렵고 힘든 일일 수록 나를 잘 다독이고, 조금씩 조금씩 용기 낼 수 있도록 응원해주어야 한다. 생각이 행동으로 바뀔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한 발자국 내디뎌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망가지 않고 내가 내 곁을 끝까지 지켜주어야 한다.

  

  나와 내 소중한 이들을 사자가 끝내 집어삼키지 않도록 모른 척하지 말고,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은 질 수 있는 체력과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도록 평상시 나를 단단하게 잘 챙겨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1. 제일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관점과 사자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부분 말이다. 당신은 어떤 마음인지도 궁금하다. 클레망스가 불쌍한지 아니면 이제 먹을 게 사료밖에 없는 사자가 불쌍한지...

  다정하게 댓글로 답해주시는 분은 복 많이 받으실 거예요. 하핫!


2. 당장의 나의 회피는 운동이다. 머리와 마음과 손발이 이리도 따로 놀다니 T.T  상반기에는 꼭 실천할 수 있기를!


3. 그림책 <사자는 사료를 먹지 않아>는 앙드레 부샤르 님이 쓰고 그렸고, 이정주 님이 옮기셨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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