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덟 번째 방. 아주 슬프지만은 않은, 조금은 따듯한 길.
10. 여덟 번째 방. 아주 슬프지만은 않은, 조금은 따듯한 길.
택시 아저씨는 횡재했다고 했다. 오후에 태운 손님 하나가 건대입구에서 삼성동으로, 삼성동에서 다시 자양동으로, 자양동에서 다시 천호동으로 서울을 종횡무진했으니 그럴만했다. 나에게 재수 없는 날이 택시아저씨에게는 운수좋은 날이었으니, 아저씨한테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사달라고 하고 싶었다. 나를 왕 대접하며 이리저리 운전을 해 주고, 게다가 친절하게 얘기까지 나눠주니, 난 택시아저씨의 그 다정함에 내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무슨 공부를 하기에 책이 그렇게 많아요?” 라든지, “젊은 아가씨가 무겁게 그렇게 짐을 들고 다니면 안 되지” 라든지, “아! 공무원 시험? 지금은 힘들더라도 합격하면 대박이지” 라든지. 택시 아저씨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빗속을 달리는데, 나는 내가 이런 대화를 무척이나 그리워했음을 알았다. 비록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호의를 갖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 내가 사람이라는 것, 내가 나 아닌 남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익숙하지만 낯선 그 느낌이 소중했다. 택시 트렁크에 책이 든 박스 2개와 트렁크 1개를 싣고 여덟 번째 방으로의 이사는 그렇게 아주 슬프지만은 않은, 조금은 따듯한 길이었다.
여덟 번째 방은 세 번째 방이었던 외할머니 댁이었다. 외할머니 댁의 작은 방은, 내가 서울 하늘 아래 정말로 정말로 갈 데가 없을 때마다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징검다리 같은 방이었다. 그 곳은 건너가기 위에 잠시 디딜 수만 있을 뿐 머물 수는 없는 곳이었다. 그 곳에 이빨이 다 빠져버린 외할머니가 혀를 끌끌차며 앉아계셨다.
“또 왔냐.”
“할머니……죄송해요.”
“아유, 짐을 지고 이리로 저리로 왔다갔다, 엄마 속상하게 왜 그러냐.”
“할머니……죄송해요.”
“엄마가 얼마나 속상하겠냐.”
“할머니, 한 달만 있다가 갈게요.”
할머니는 이리저리 짐짝을 끌고 다니며 방황하는 나보다, 걱정하는 엄마를 더 걱정했다. 외할머니는 잔정이 없는 분이셨다. 마음씨는 천사처럼 착한 분이셨지만 표현이 없으신 것인지 정이 없으신 것인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할머니는 밥을 지어주셨다. 팥밥이었다. 할머니는 밥에다 팥을 섞어 드셨다. 팥밥을 먹으며, 아 내가 할머니 집에 왔구나. 또 할머니 집에 왔구나. 내가 서울 살이 중에 하다하다 안되면 마지막에 오는 그 집에 왔구나, 했다. 할머니의 팥밥에, 나에 대한 걱정과 한숨과 질책이 섞여있는 것은 아니겠지, 엄마에 대한 걱정과 나에 대한 미움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난 점점 그런 생각, 그런 눈치, 그런 주눅에 익숙해져갔다.
목표로 한 시험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할머니 집 근처 독서실로 공부를 하러 다녔다. 평일 낮의 독서실은 텅텅 비었고 어두웠다. 열람실 안에 공부를 한답시고 앉은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하교한 중고등학생들이 왔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휴게실에 모여 컵라면을 먹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학생들이 오기 전에는 내 세상이던 독서실도 학생들이 오고나면 잘 못 찾아온 곳처럼 내가 외부인 같았다. 수다를 떨며 간식을 먹고 있던 학생들은 내가 휴게실에 나타나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내 돈 주고 이용하는 독서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눈치가 보였다. 분명 내 얘기를 할 거야. “저 언닌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왜 여기 오지? 백수인가봐.”라고 나를 두고 수군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어떤 생각도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공부에만 초 집중하여 매진해도 모자랄 판의 그런 급박한 시국에 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그 속에 퍼질러 앉아 있곤 했다.
시험은 청주에서 치러야했다. 계획대로였다면 나는 청주에 있던 여섯 번째 방에서 시험을 치러야했으므로 시험장소 지정을 청주로 해둔 까닭이었다. 시험을 치기 위해 청주로 내려가기 전날 밤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달 새 너는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신호는 길게 울렸고, 너는 가까스로 전화를 받았다.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는데 너는 독서실에서 공부중이라고 했고, 나는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너는 나에게 어째서 공부를 안 하고 누워있냐고 물었다. 나도 나에게 묻고 싶었다. 어째서, 너는 공부를 안 하고 누워있냐고. 어째서, 너는 합격을 벌써부터 포기하고 있냐고. 어째서, 너는 내일 떨어지기 위해 청주로 가는 것이냐고. 어째서, 너는 가슴 저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더 바닥으로, 발바닥 밑 저 땅 끝으로 절망하고 있는 것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