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모든 조명이 꺼지다.
11. 모든 조명이 꺼지다.
때로는 겪지 않아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너무도 확연하게 확신하며 아는 경우가 있다. 나는 시험을 치기도 전에 내가 떨어질 거란 걸 알았다. 시험장에서 나오는데 엄마와 동생이 수척해진 얼굴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몇 달 만에 보는 엄마 얼굴에 다짜고짜 눈물부터 났다. 엄마가 조금만 더 참고 공부해보라고 청주를 가겠다는 나를 말렸을 때에 엄마 말을 들을 것을. 갈 곳도 없으면서 짐을 싸들고 이리저리 헤맨 것을 생각하니 내게 엄마가 있다는 것이,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몇 달 만에 만난 엄마 얼굴은 더 수척해져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무얼 먹고싶냐”고, “다 사주마 먹고 싶은 걸 말만 하라”고 했다. 나는 “숯불돼지갈비” 라고 답했다. 엄마는 동생에게 청주에서 제일 맛있고 비싼 고기집으로 가자고 했다.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나는 지금 막 지나가려 하고 있다. 이 지점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란 너무나 괴롭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그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다.)
엄마는 웬일로 다정하게 고기를 구워주고, 고기가 없어지는 대로 추가 주문도 해 줬다. 평소 엄마답지 않게 콜라도 주문해주며 실컷 먹으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상하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일단 주어진 산해진미를 마음껏 음미했다. 엄마가 사주는 고기를 먹으며, 아빠와 남동생은 빠졌지만, 가족이 모여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는 따듯함을 느꼈고, 숯불에 잘 구워진 고기를 씹으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미워하고 원망해도, 남보다 못하다 싶을 때가 있어도, 가족이라는 의미, 그것이 무엇인지를.
좋아하는 고기를 배불리 먹으며, 나는 몇 개의 방을 전전하며 절망 속을 걷던 날들을 모두 씹어 삼켰다. 목표로 했던 시험은 망했지만, 아직 시행처가 다른 시험들이 있으니 기회는 남아있었다. 나는 잘 되리라, 지금은 모두 과정이리라, 나는 보란 듯 이겨내리라, 나는, 나는, 나는, 강하니까, 밝으니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맛있게 익어가는 고기 앞에서, 웃는 동생과 그런 나와 동생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 앞에서, 나는 정말로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것은 어쩌면,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는 충전소 같은 곳일지도 모르겠다고, 오랜 타향살이를 했지만 가족이라는 전원에 코드를 꽂고 그 에너지로 여태껏 살아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서울로 올라가 짐을 챙겨 다시 집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고기집은 청주에서 가장 잘 되는 숯불돼지갈비집이었다. 3층 건물이었는데 우리는 2층 창가에 앉아 고기를 구워먹었다. 8월, 여름이었다. 엄마는 마지막에 냉면까지 시켜주었다. 시원한 냉면 국물을 마시며, “아 오랜만에 정말로 행복하다!”고, 엄마에게 “서울로 올라가 짐을 챙겨 집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할 찰나였다. 엄마는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엄마는 보통 할 말이 있다며 뜸을 들이거나, 할 말을 예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말이 생각을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할 말이 있다고, 잠시 앉아보라고 하자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이 나를 휩쌌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와 고기집 1층 로비에 앉았다. 편평한 벤치모양의 나무 모자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후식으로 내려먹는 믹스커피 자판기가, 자판기 옆으로는 키가 큰 벤자민 나무 화분이 놓여있었다. 나와 동생은 나무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았다. 에어컨바람 때문에 여름인데도 의자가 서늘했다.
나는 지금, 조명이 꺼진 것 같은 그 순간의 영상을 가까스로 재생시켜보려 애쓰는 중이다. 그날, 그 순간 이후 나는 유령, 혹은 무대 위의 연극배우처럼, 나로부터 분리돼 나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생기게 됐으므로 집중을 하면 그날 이후 내 모습을 영사기처럼 돌려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날 서늘했던 의자 위에 앉아있던 나를 본다. 한껏 배불리 먹어 마음이 늘어져 있었고, 손에는 커피 한잔을 들고 있었고, 책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반쯤 내려놓고 있었고, 반바지에 운동화차림이었고, 엄마의 예고 앞에 긴장하고 있었다. 엄마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나의 노력과는 달리 나의 생각은 내가 가장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나 큰 일이기에 엄마가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걸까. 나는 모든 상황을 가정했지만, 그러나 가장 마지막 상황은 가정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윽고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마와 아빠는 헤어졌다.”
헤어졌다,고 했다. 헤어지려고 한다,라거나, 헤어지기로 했다,가 아니라 헤어‘졌’다,라고 했다. 완전한 과거형, 완전한 종결형으로 엄마는 말했다. 거기에는 일말의 불확실성이나 미래의 열린 가능성이 들어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완전한 과거시제였다. 엄마와 아빠는 헤어졌다고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가 되물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했다고 했다. 정확히 8월 6일에 이혼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다고 했고, 지금은 조정기간이라고 했다. 그 날은 8월 11일 이었다. 나는 조정기간이라는 말에, 일말의 불확실성이나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기대하며 물었다. 그럼 아직 완전히 헤어진 건 아니네?라고. 엄마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다고 했고, 헤어질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했다. 막냇동생에 대한 양육권은 엄마가 갖기로 했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엄마 앞으로 하는 것으로 위자료를 갈음하기로 했다고 했으며, 아빠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고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형체 없는 유령이 돼 내 눈앞을 떠다녔다. 이혼, 양육권, 위자료, 퇴직, 행방불명. 그 다섯 개의 단어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바라보지 못하고, 어딜 바라보는지 모르는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들도 힘들겠지만, 엄마도 정말 참을 만큼 참았다. 엄마 혼자 잘 살자고 이렇게 결정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하고 같이 잘 살기 위해서 이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너희 둘은 성인이니까 힘들겠지만 알아서 잘 살아주길 바란다. 훈이는 엄마가 최선을 다해서 키울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눈물이라도 나와주면 울기라도 할텐데, 눈물조차 나지 않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옆에 앉은 동생도 눈물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말을 멈췄다. 나와 동생이 아무 말 없이 멍하게 앉아있자, 엄마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커피가 담겼던 종이컵을 구깃구깃 만지고 앉아있었다.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이 급격히 낯설어지고 있었다. 엄마도 동생도 나조차도 남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떤 느낌을 가져야할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언젠가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난 후 모든 것이 사라진 나가사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처럼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한 줌의 재로 사라져버린 잿빛 풍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나 자신도 마치 사라졌다는 듯이 앉아있었다.
“알겠어.”
한참 후 입을 연 나는 알겠다고 했다. 이후의 시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기억이 나지 않을 수가 있는지,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엄마와 동생과 헤어졌는지, 어떻게 다시 청주에서 서울로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치 그 부분만 가위로 깨끗하게 오려낸 오래된 신문처럼, 내 무의식은 그 날 그 시간 이후의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