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지 않는 방

16. 길에서 만난 한 시인이 내게 꿈을 꾸라고 말하자

by 올리브유

16. 길에서 만난 한 시인이 내게 꿈을 꾸라고 말하자


열한 번째 방은 신림동 고시촌 가장 아랫동네에 얻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던 고시원이었다. 한 블록만 걸어 나가면 버스가 다니는 대로가 있고, 앞으로는 큰 마트가, 옆으로는 독서실이, 또 뒤로는 고시식당이 있는, 고시촌 번화가 한 가운데 방이었다. 나는 어둡고 외로웠던 녹두거리 비탈길 열 번째 방에서 나와, 잠을 자려 누워도 사람들의 말소리나 고함소리, 자동차 경적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거리 위의 열한 번째 방으로 나왔다. 죽음에의 유혹에도 익숙해져, 이젠 까맣고 커다란 밤 고양이를 마주쳐도 놀라지 않고 지나가듯, 그렇게 쉽게 지나쳤다. 그래, 될 대로 돼 보라지. 그래 까짓것, 죽지 않았으니 살아가는 거지. 나는 그 시끄럽고 붕 떠있는 듯한 열한 번째 방에서 등짝에 붙어있던 딱딱한 껍데기를 벗어보려 몸을 꿈틀대기 시작했다. 계절은 다시 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꽃이 피기 시작했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밤마다 죽어야 할 이유를 생각하며 잠들던 나는 더 이상 죽어야 할 새로운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다시 살아야 할 이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꿈. 꿈이라는 것. 나의 꿈이라는 것.


모든 시작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 창고의 어둑한 조명 아래 마주 앉은 팀장님이 내게 왜 회사를 그만두려 하느냐 물었을 때에, 내가 당당하게 말했듯이. 그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한 편의 시 때문이었다. 2008년 4월 6일의 일이었다. 나는 너무 날씨가 좋아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려 독서실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이리저리 배회하다 ‘EBS 명사의 스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시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적고 있다.


<2008년 4월 6일의 일기>

"시인은 원고지 위에 글자로 자신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공부를 시작하고나서부터는 시간 관념이 없어졌다. 1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던 나였는데, 이제는 지금이 2005년인지 2006년인지 2007년인지 2008년인지, 그래서 내 나이가 지금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시작한지 2년 7개월이 됐다. 언뜻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지만은 또 굳이 떠올려보면 행복된 추억도 많은데, 어제처럼 날씨가 좋은 토요일, 또 하필 계절이 봄일 때에는, 마음이 멀미를 심하게 하듯 너무도 울렁거려 그대로 독서실에 앉아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기에-이리저리 배회하다 신달자 시인을 만났다. EBS 명사의 스승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고정하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어쩐지 가슴이 다시 또 울렁이기 시작했다. 뭐랄까. 이산가족 상봉한 느낌이랄까. 시집이 빼곡하게 꽂힌 시인의 방이며, 손때 묻은 수첩, 벤치에 앉아 넋 놓고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이-내가 잃어버린 것이었으나 언제 어떻게 잃어버린 것인지 모르는, 그렇다고 사소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한때 삶을 지탱해준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크고 소중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잃어버린-그런데 분명히 내 것 이었던 그 것이었다. 그 것?


시인은 어린 시절 시인을 꿈꾸었다. 시를 통해 삶을 열망했고, 운 좋게도 김남조 시인을 사사하고 박목월 시인과도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시인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시와 멀어지게 되었다. 살다보니, 이러하다보니, 저러하다보니, 어찌하다보니, 정말 사는 게 바빠서, 부대껴서, 한때 자신이 모든 것을 바치리라, 심지어 목숨까지도 아깝지가 않을 것 같았던 문학을, 시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다 시인은 이상한 병을 앓게 되었는데 새벽 2시가 되면 자다가 일어나 몽유병 환자처럼 자꾸만 서랍을 뒤지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찾을 것이 없는데, 나타날 것도 없는데, 올 사람도 없는데,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것은 마음 속에 큰 상실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잃어버린 무언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찾는 병. 부군이 “당신 뭘 찾아?” 물으면 “몰라 나도”하면서 그렇게 밤이 새도록 서랍을 뒤지는 병.


그러던 어느 날 시인은 알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무작정 집을 나와 버스를 탔다. 재연녀가 당시 시인의 모습을 하고 버스에서 내린 곳은 종로였다. 좁은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햇볕을 쬐고 앉은 그녀의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았다. 그 모습 위로 시인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 이야기, 그 모습, 그 힘없는 발걸음, 그 답답증, 그 사지 절단된 맹수의 한숨 같은 미소, 그 초점 없이 약 10도 가량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고개. 너무 큰 것을, 너무 중한 것을 상실해버렸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며,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표정. 나는 마치 내 모습을 TV에서 보는 것만 같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 운명처럼 목월 시인이 튀어나왔다. 일면식이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목월 시인은 신달자 시인을 알아봤다. 그리고 찻집에서의 대화.


(목월 시인은 신달자 시인을 연민과 애정과 엄함이 담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고. 신달자 시인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양말은 발목양말, 신발은 앞이 막힌 부엌 슬리퍼, 누가 봐도 약간 정신 나간 것 같은 행색.)


목월 : “시를 쓰거라. 자네는 시를 써야 한다.”


달자 : “아닙니다. 저는 이미.......늦었습니다. 포기했습니다.”


목월 :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다 호통을 치며) “무신 소리고? 니는 시를 써야 한다. 당장 이번 주 일요일부터 우리 집으로 와서 배우거라.”


달자 : “네? 제가 선생님 댁에요?”


그렇게 신달자 시인은 1년이 넘도록 목월 시인의 집 문턱이 닳도록 다니며 시를 배웠다. 어떨 때에는 글씨가 너무 크다고, 어떨 때에는 글씨가 너무 작다고, 목월 시인은 시인의 시를 읽어보지도 않고 던져버렸다고 한다. 시인은 일요일마다 목월 시인에게 시를 보여야 한다는 그 것이 자신에게 굉장한 에너지가 됐다고, 그 에너지로 더 열심히 청소하고, 반찬도 더 맛나게 만들고, 남편에게도 더욱 잘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그리고 그 에너지로 시를 썼고, 다시 피어날 수 있었다고.


자신의 모든 영광을 김남조, 박목월 두 스승에게 돌리는 신달자 시인을 두고 김남조 시인은 말했다. 지금의 신달자를 있게 한 것은 그가 겪어온 모든 고통과 외로움과 괴로움이었다고. 지금 그가 있는 것은 그가 겪었던 고난 때문이라고.


그녀는 결혼 8년 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24년간 병상에 있던 남편과 아픈 부모를 봉양했다. 천안에서 부모님의 병간호를 하고, 인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었으며, 서울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수발했고, 두 아이를 낳아 길렀다. 너무도 간단히 정리되는 가시밭길, 생각만 해도 그 마음 평생 얼마나 아프고 무거우며 시달리고 지치고 시렸을까.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극복해냈다. 시를 쓰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 삶을 통해 이렇게 죽음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있는 나를 희망을 빛으로 비추어준다. 고통 속에서 자신을 구제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까지 희망을 주다니. 그 말을 듣고 시인의 눈을 들여다보니, 그렇게 깊을 수가, 그렇게 그윽할 수가, 또 그렇게 따듯할 수가.


그래 맞다. 수많은 고통,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마침내 극복한 사람이야말로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눈빛, 그러면서도 한없이 겸손한 눈빛. 노랗게, 붉게 지는 노을빛 같은.


그래서 이제 내가 이 봄날 아침에 목련꽃이 활짝 피어 웃고 개나리꽃도 활짝 피어 까르르 까르르 아침부터 재잘거리는 이 시간에 나를 위해 남기고 싶은 일기는 이것이다.


나 한때 정말이지 문학소녀였다. 발병한 듯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 수업도 안 듣고 시를 쓰고, 야자시간에도 시를 썼다. 기억나니. 그 매미란 시, 풀이란 시, 방이란 시, 혼자 쓰다 가슴이 아파 울기도 하고, 혼자 쓰다 가슴이 벅차 쓰윽 눈물을 닦곤 했던 그 열정을. 그리고 심지어 기억이 난다. 그 어린 마음에 신께 기도했었다. "저 작가가 되고 싶어요. 어른이 되면 이런 마음이 다 없어진다는데, 주님 나 어른이 되어도 이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꼭 도와주세요"하고. 정말 그 어린 마음에 무엇을 알았을까. 작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알았다면 아마도 난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신이시여, 저 그냥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세요. 좋은 대학 나와 좋은 곳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고, 멋진 남편 만나 결혼도 잘 하고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떵떵거리며 살게 해 주세요" 하고. 그런데 나 왜 하필이면 가장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던가. "저 작가가 되게 해 주세요"하고. 그때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가슴을 그렇게 뛰게 하고, 나를 그렇게 살고 싶게 한 것은 없었으므로.


세상에 재밌는 것은 문학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부터는 재미난 것이 너무나도 많아져 놀고 먹느라고, 또 일하느라고, 또 과 활동을 하고, 멋도 모르고 학생운동에 따라다니기도 하느라고 1학년을 보내고, 이후엔 동아리를 하느라고 바빠졌고, 시도 소설도 시시해져, 한갓 취미이자 특기(?)이자 재밋거리로 전락해버렸고, 잠시 취직을 했을 때에는 심지어 내가 문학을 좋아해 국문과를 나와서 아무 특기도 전문성도 없는 직업을 선택했어야 했었다는 둥, 또 시대에 뒤떨어진 한량놀음이나 하자고 국문과를 나왔냐는 둥, 내가 문학도라는 것이 싫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돈도 안 되고, 전문성도 없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취미이자 특기였다고, 그리고 그것이 최고인줄 알았던 나는 너무 어려서 그랬던 거라고, 매장 후방에서 박스를 까며 나는 이를 갈았었다. 다시 태어나면 난 이과를 가서 의사가 되든지, 법대를 가서 판사가 되든지, 경영대를 가서 회계사가 되든지...하면서, 완전한 속세의 기준으로 나를 난도질했다. 나는 잊고 있었다. 문학이, 시가, 소설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또 어떤 의미가 돼야 할지를.


내가 자꾸 힘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공무원이 되는 이 일을 목숨을 걸 만큼, 내 삶을 바칠 만큼 열망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2년 7개월 만에 TV를 보다가 간신히 깨달았다. 사람이 태어나 생각만해도 가슴이 벅차고 뛰는 일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만화가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십자수,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이, 의사가, 판사가, 회계사가, 감정평가사가, 변리사가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친구에게는 복식사가, 건축이, 또 어떤 언니에게는 교사가 되는 것이. 그러나 나에게는 그 어떤 것들도 의미가 없다.


내가 시를, 소설을, 글을 떠올릴 때에는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에너지가 넘칠 때에는 열정이 되고, 힘이 없을 때에는 슬픔과 비애가 된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매우 집중하게 하고, 나를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상태, 원초적 자아의 모습에 가깝게 한다. 떠올려보면, 내가 가장 나 울 때는 아마도 내가 글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닌가 한다. 온전히 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 내가 냄새나면 나는 대로, 켕기면 켕기는 대로, 비열하면 비열한대로, 그대로 드러내 보여줄 줄 아는 자신감을 담아, 한 글자, 한 문장 숨을 불어넣어 나의 생명을 글자로 드러내는 글, 그런 글을 쓸 때에 가장 나다운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나를 세상에 내어, 약속하신 대로 내게 마련해주신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나는 지금 직업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다. 나는 유행에 따르지도 못하고 요즘 여자애들처럼 꾸밀 줄도 모른다. 나는 촌스러우며, 현학적인 대화를 구사할 줄 모르고, 상식이 부족해서 무식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아는 것도 많지 않고 공부한 것도 적다. 그렇지만 시를 떠올릴 때에, 내 마음은 한없는 기개로 가득 차올라, 정말로 창공에 나부끼는 하얀 깃발처럼 설렌다. 꽃이 피기 전 2월쯤에, 그 훨씬 전인 1월이나 12월에도 눈(嫩)을 볼 수 있다. 그 눈(嫩)이 가진 생명력은 굉장하다. 한겨울에도 눈은 봄에 필 꽃을 단단한 껍질 속에 품고,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는 사람같이. 그 손톱만한 눈에서 어찌 저렇게 하얗고 커다란 목련꽃이 피어나는지, 저 쌀알만 한 눈에서 어찌 저렇게 샛노란 개나리가 터져나오는지, 눈이 가진 생명력은, 그 응집력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나는 시가 그러한 눈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화려하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그 안에 온갖 열매를, 온갖 꽃을, 온갖 생명을, 온갖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상상해보라. 꽃이 없다면, 나무가 없다면, 또 쌀이 없고 밀이 없고 보리가 없다면, 당장 우리는 먹을 것도 없고, 집 지을 것도 없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도 없다. 그러니 시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밖에. 그리고 내가 그것에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시는 그런 생명과 응집의 에너지로 어린 시절부터 나를 이끌었고, 나는 그 에너지로 이만큼 성장해왔다.


세상에서 처음 만난 친구가 글이었다. 산문이었고 운문이었고, 시였고 수필이었고 소설이었다. 편지였고 일기였다. 내가 힘들고 너무도 초라할 때에도 나를 일으켜 준 것은 다름 아닌 일기였으며,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보내주는 편지와 카드였다. 나를 위로해주고 치유해주고 기쁨을 준 것이 음악이라면, 거기에 더해 나를 형성하고 가르치고 이끈 것은 문학이었다. 그것을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그것을 포기한다면, 그것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면, 나는 나의 생명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세상 소음 핑계를 대며,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야! 그것은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야! 그것은 너무 철없는 생각이야! 뱀이 유혹하더라도, 나는 현명하고 슬기롭게 이 길을 걷겠다. 그리고 내가 문학에서 희망을 얻고 생의 에너지를 얻듯이, 그 누군가에게도 그런 희망과 삶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면, 정말 상상만 해도 나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잊지 말자고 이 일기를 쓴다. TV에서 세 사람의 시인을 만난 일, 비록 지금은 이렇게 독서실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뭔지도 모르는 공부를 하고 있지만은, 멀미가 날 정도로 심장이 다시 뛴 일, 또 다시 앞이 안 보이고 막막한 심정이 들 때에는 이 일을 기억하며 행복 된 마음을 찾자.


아! 나에겐 꿈이 있구나.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기약 없이 나를 내몰아도, 생각만으로도 금세 방긋방긋 웃을 수 있는 꿈이 있구나!


신달자 시인이 정처 없이 헤매다 종로 길거리에서 박목월 시인을 만난 때가 시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내 나이 지금 스물일곱, 나도 신달자 시인처럼 다시 태어날 것이다. 놓았던 줄을 다시 잡을 것이다. 김남조 시인과 목월 시인은 신달자 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보배가 돼 신달자 시인을 키웠다. 나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시인은 원고지 위에 글자로 자신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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