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나는 다시 피어났다, 겨울나무에서 봄 나무로
17. 나는 다시 피어났다, 겨울나무에서 봄 나무로
눈을 감으면-아직도 그 날 아침의 그 햇살이 느껴진다. 나는 다시 글을 쓴다면, 죽어있던 나의 나날들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거라고, 나의 글로 내 자신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나는 다.시.살.아.날.수.있.다.고. 내 마음에 외쳤다. 비로소 눈물이, 정말 오랜만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책상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나는 그렇게 그 날 아침, 죽음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며칠 후 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듣는데, 지문에 이런 시가 나왔다.
겨울-나무에서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몸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몸으로 그대로 나무가 된다. 이 시를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 눈물이 진녹색이 되어 내 온몸을 적시는 영상을 보았다. 내 눈에서 떨어진 눈물 방울 하나하나가 책장을 초록색으로 적시고, 책상도 의자도 나도 가방도 아메바처럼 흐물거리며 진녹색 거대한 생명체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면, 난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 난 그래도 너무나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 아무리 휘둘리고 몰아쳐도 난 내 호박꽃과 함께 노랗게 빛나고 있다는 것, 나를 망칠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과, 나는 결코 나를 놓거나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나를 너무도, 눈물나도록, 절절히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은 낯선 표정의 낯선 피부 낯선 눈동자의 내가 의아한 듯 나를 보지만은, 그래도 알고 있었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 의해서, 난 충분히, 너무나 육중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누구도 나를, 내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겨울나무에서 봄나무로, 뜨거운 혓바닥을 밀어올리며, 영하 5도에서 영상 5도로, 영상 13도로, 영상 20도로 마구 들이밀며, 내 창문틀 나팔꽃처럼 정신없이 휘감기며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아프고 괴롭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더라도, 이렇게 나는 온 몸으로 나무가 되고 있다는 것을.
쉽지 않은 길, 불안한 길, 아무 부귀영화도 없는 길, 그렇지만 내가 나무가 되어 내 녹음이 무성히 드리울 그 길을 나는 피를 철철 흘리며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 잎사귀 무성히 드리운, 그래서 새들이 깃들이고 지친 이가 쉬어가는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내 앞에 펄펄 끓는 이 에너지, 죽은 체 누워있는 곰같이 거대하고 육중한 이 에너지는 언제든 다시 살아 펄떡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은 좋은 것이 될 것이었다.
그 밤은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밤이었다. 의미 없는 확인, 의미없는 불안, 의미없는 의미에 휩싸이지 않고, 오로지 나로서 존재하는 그런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