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엎드려있는 새의 날개를 가만히 흔들어본다
19. 엎드려있는 새의 날개를 가만히 흔들어본다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 넘어질 것만 같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핑그르 돈다. 무엇을 썼고 무엇을 쓰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읽어보려니 벌써부터 머릿속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지직거린다. 당장 삭제버튼을 눌러 모든 걸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깟 것 써봤자 뭘 해? 뭘 어쩌겠다고.
하지만 알고 있다. 지우려면, 버리려면, 그래서 다시 가지려면 써야만 한다는 것을. 무엇을 썼고 무엇을 쓰지 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힘들었지만 결국 끝까지 왔다는 것을, 끝까지 왔으니 이제 비로소 끝이 났다는 것을.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려준다. 지루해도 괜찮아, 재미없어도 괜찮아, 엉망진창이어도 괜찮아, 다 괜찮아. 넌, 끝까지 온 것만으로도 잘 한 거야. 다시 한 번 등을 두드려주고.
따듯한 물을 받아 무차를 한 잔 마신다. 모든 것이 끝난 지 10년 만에, 나는 다시 모든 것을 끝냈다.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해 아이 엄마가 되었다. 새벽 두 시, 안방에는 남편과 빨간 보석 같은 내 딸아이가 잠들어 있고, 거실에는 하루 종일 아이와 남편이 뒹굴며 함께 논 매트 위에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정겹게 흩어져있다. 무차를 들고 창가에 서 야경을 내려다본다.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집에서는 남산타워도 보이고 종로 세무청도 보이고 그 너머 용산 쌍둥이 빌딩도 보인다. 그 앞으로 서울 성곽이, 또 그 앞으로는 대학로 거리가, 또 그 앞으로는 돈암동 빌라촌이, 또 그 바로 앞으로는 눈 쌓인 놀이터가.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불빛이 따듯하게 흔들린다. 사람들이 살아가며 뿜어내는 불빛들, 겨울의 불빛들, 따듯한 그 불빛들을 바라보며 무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문을 연다.
차가운 겨울바람.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맞는다. 얼굴이 아프다.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속에서 나는 열두 개의 방에 앉아있다. 아무리 불을 켜도 불이 켜지지 않는다. 불이 켜지지 않아 나는 어쩌지, 어쩌지 불이 켜지지 않네, 하다가, 울고 몸부림치다가, 비로소 알게 된다. 그 방에서 가장 환했던 것은 바로 나였음을. 그 방에서 가장 빛나던 것은 바로 나였음을. 내 안의 빛으로 나는 그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음을, 나는 그 방들에서 비로소 진짜 꿈을 찾았음을.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보챌 때면 나는 가만히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는다. 그러면 나는 아직 그 방에 혼자 고요히 존재하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아팠던 청춘의 모습 그대로, 반짝반짝, 빛나며, 낮은 숨을 고르고 있다. 부러졌던 날개는 괜찮은지, 상처는 다 아물었는지, 다시 날 수 있겠는지, 엎드려있는 새의 날개를 가만히 흔들어본다. 새는 머뭇머뭇 하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잠시 새의 눈을 들여다본다. 너무 오래 울어 깊고 고요해진 눈동자. 그리고 침묵. 괜찮아. 모든 것이 다 지나갔어. 날개를 펼쳐봐.
새가 창문 앞에 섰다. 두 팔을 벌려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더니 겨울바람을 타고 휘-휘, 내 눈 앞에서 이리저리 날갯짓을 한다. 새가 나를 돌아다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새는 두 팔 벌려 내 눈앞에서 빙그르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돌더니 겨울 밤 창공을 향해 날아간다. 손을 흔든다.
안녕, 그 동안 고마웠어. 잘 가, 행복해야해.
오늘 밤, 새와 함께 겨울 밤하늘 위를 날을 것이다. 겨울바람을 타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