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꿈을 포기하기엔 넌 아직 너무 젊구나
5. 꿈을 포기하기엔 넌 아직 너무 젊구나
새파란 청춘은 가진 것이 젊음뿐이란 말이 맞다. 나는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었다. 일이 너무 힘들어 더 오래 다닐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허울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회사에 있는 시간이 아까웠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나의 소중한 시간을 회사에 고스란히 바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정말 말이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일이 너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 첫 직장은 자칭 우리나라 1등 할인마트라고 하는 마트마트 이마트였다. 나는 아침 8시 30분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다. 오전 출근반과 오후 출근반이 있었지만, 오전 출근반일때에는 밤 12시까지 야근을, 오후 출근반일때에는 아침 8시 30분에 조기 출근을 해야하는 일이 잦았다. 자동차용품과 어린이용품 담당PM이 내 직책이었지만, 실상 하는 일은 내 밑으로 있는 20여명의 아르바이트 여사님들과 함께 매일 박스를 까는 일이었다. 주말이면 개미 아니면 콩나물 아니면 땅콩 아니면 무채색 동그라미 같은 얼굴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이런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인파는 대단했고 나는 그 인파에 질식할 것만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지하1층과 지하 2층 매장에서 하루종일 무채색 동그라미들에게 굽신거리거나 조명이 어둑어둑한 후방 창고에서 박스를 까거나 나보다 스물다섯살은 많은 잔뼈굵은 여사님들을 휘어잡아 일을 시키거나, 여사님들이 어린 상사를 적당히 구슬려가며 이용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러다 새벽 1시 막차를 타고 방으로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잠들었다 다시 7시 30분이면 집을 나와 마트 지하매장으로 가 박스를 까고, 엄마같은 사람들을 부리고, 고객님으로 불리는 왕에게 큰절하는 삶. 지하매장은 무덤이었고, 공덕동 첫 번째 그 방은 시체를 뉘는 관이었다.
나는 사랑하고 싶었다. 너를 사랑하고 싶었고, 나를 사랑하고 싶었고 나의 삶을 사랑하고 싶었다. 눈 앞에 보이는 비상구는 오로지 퇴사 뿐이었다. 고민은 일주일, 선택의 순간을 짧았다. 퇴사의지를 팀장님께 알렸던 날, 마트 후방 창고에서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박스를 깔고 앉아서 팀장님은 내게 말했다.
“그만 두겠다고?”
“네.”
“왜?”
“꿈이 있어서요.”
거기서 뜬금없이 꿈 얘기가 왜 나왔을까. 연애 얘기라면 몰라도, 꿈 얘기는 너무 가식적이었다.
팀장님은 ‘꿈’이란 말에 반응했다.
"무슨 꿈?“
“더 가치있는 일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요.”
“그게 뭔데?”
“문화재를 관리하고 어쩌고, 구비문학을 전승하고 어쩌고, 한국 전통문화를 보전하고 어쩌고.”
“응 그래?”
“네.”
“그게 네가 말하는 너의 꿈이니?”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근데 말이다. 사람이 밥벌이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네, 알아요.”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내 가족들이 먹고 살고 하는 걸 보면 그것도 보람이야.”
“전 먹여 살릴 가족이 없어요.”
“회사에 오래 다니다보면 보람도 생기고 그래.”
“회사에 오래 다닌 분들을 봐도 좋아보이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니 너무 비참하구나.”
“죄송합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나도 꿈이 있었단다.”
"아, 팀장님도 꿈이 있으셨어요?“
“있었지. 세월을 살아가다보니 이렇게 됐지만...나에게도 꿈이 있었지.”
“아...네...”
“몇 살이지? 올해로?”
“스물 네 살이에요.”
“스물 네 살.”
팀장님은 내 나이 ‘스물 네 살’을 천천히 발음했다.
그리고 다시 몇 초간의 침묵 끝에 고개를 든 팀장님이 내게 말했다.
“그래 가라. 꿈을 포기하기엔 넌 아직 너무 젊구나.”
스무 네 살, 꿈을 포기하기엔 아직 너무 젊은 나이. 그 시절 내가 말했던 그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팀장님이 이루지 못했던 그 꿈은 무엇일까. 그때 지금처럼 간절히 작가가 되길 바랐다면 이미 난 작가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때 나의 꿈은 문화재청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더 솔직히 속내를 말하자면, 너와 함께 공부하고, 너와 함께 커피마시고, 너와 함께 도서관 다니며 공부하는 척 연애하다가, 너와 함께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고 너와 결혼하는 것이 나의 꿈이었나보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꿈이라 말해왔던 ‘작가’는 나중에, 언제나 ‘나중에’였다. 시간이 많을 줄 알았으니까. 내게 남은 시간 따위는 단 한 번도 계산해 본 적이 없는 새파란 청춘이었으니까. 시간이란, 삶이란, 지겹도록 출렁이는 파도처럼 내 앞에 영원히 밀려들어오는 무한한 존재로 느껴졌으니까.
이사가 시작되었다. 바퀴벌레가 들끓고, 하수구 냄새가 천장까지 치솟던 화장실과, 에머랄드 색 환풍기가 밤낮으로 돌아가던 공덕동 3층 월세방을 떠나던 날 나는 너무 신이 났다. 관에서 벌떡 일어난 것처럼, 무덤에서 살아돌아온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첫 번째 방을 떠나 두 번째 방으로 갔다.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 그토록 중대한 플롯포인트였음을, 그 시작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모른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