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두 번째 방. 천(千)의 귀를 달고.
6. 두 번째 방. 천(千)의 귀를 달고.
두 번째 방은 천호동에 있는 외할머니댁의 작은방이었다. 지방에서 자란 나는 대학을 서울로 진학하면서 외할머니댁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대학 졸업하고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된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네 엄마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었는데 그걸 저버리고 말(馬)만한 딸년이 제 밥벌이도 못해 네 엄마 마음 고생을 시키는구나.”
외할머니의 그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보란 듯 들어있었다. ‘나에게는 너보다 네 엄마가 더 중요하다. 너는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났다. 너는 이제 말만큼 장성했다. 너는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밥벌이도 못하는 백수다. 너로 인해 너의 엄마가 괴로워한다.’ 가볍게 내뱉은듯한 그 짧은 문장 안에, 단어와 단어사이에, 할머니의 한숨소리 사이사이에, 그토록 많은 의미가 담겨있으며, 그토록 짧은 순간에 나는 모든 의미를 이해하고야 만다. 마치 손가락 발가락 하물며 세포하나하나에도 다 달려있어 수천 개 아니 수십만 개의 귀라도 가지고 있다는 듯이 일 순간 한꺼번에.
어찌됐든 외할머니댁 작은 방에 기거하게 된 나는 문화재관리사라는 거짓 꿈을 이루기 위해 노량진으로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문화재청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꿈 꾼다면 누구나 합격할 수 있습니다.’
‘합격의 산실, 합격의 기쁨은 당신의 것! 남부행정고시학원과 함께하세요.’
‘오늘의 인내가 내일의 빛이 된다.’
온갖 글귀들이 치열하게 나열돼 있는 각종 행정고시학원을 전전하며 나는 무소속 무직의 수험생이 됐다. 강의를 듣기 위해 천호동 굽은다리역에서 노량진역을 향해가던 첫 날 직장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하루아침에 구두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은 내 모습을 보며, 난생 처음으로 내 모습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일기에 나는 ‘처음의 마음’이라는 제목을 붙여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 다시 책상머리에 앉았다. 딱딱한 걸상과 가방걸이 있는 책상에 가까스로 허리를 펴고 앉았다. 고개가 아프도록 쳐들어야 칠판이 보이고, 옹기종이 모인 뒤통수들이 강낭콩이나 콩나물대가리처럼 빼곡한 강의실에.
지하철에 비친 반바지차림의 나를 내가 바라보며 낯설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책가방에 짐을 잔뜩 짊어매고 어디로 가고 있니. 그러면서 교복이 입고 싶다고 생각했다. 교복 입던 때로 돌아가면 모두가 수험생일텐데.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때와 모두 같은데, 세월은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나의 곳곳에 20대 중반이라는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그렇지만 늦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처음이다. 이것이 나의 오늘이고 나의 시작이다.
딴에는 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수험생 신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꽤나 비장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가 끝나면 중학교, 그다음은 고등학교, 그 다음은 대학교에 진학했으니 이제 수순대로라면 직장에 잘 다니고 있어야 하는데, 정상궤도에서 이탈한 떠돌이별처럼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불안해졌던 모양이다. 삶이란 정해진 순서대로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애시당초 거기엔 정상궤도란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스물 넷이란 나이가 꽤나 많게 느껴졌나 보다. 새파란 청춘인 줄을, 청춘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다시 읽어보니 낯 뜨거운 일기지만 아직도 그날 아침의 풍경이 생생하다. 출근하는 직장인들(나도 그들 중 하나여야 하는데) 틈바구니에 괴나리봇짐만한 책가방을 매고 선 나의 모습이 낯설었고, 스물 네 살은 너무 늙은 것 같았고(맙소사!), 나는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서 홀로 낙오한 꼴찌 같았다. 달콤한 연애에 빠져, 사랑에 눈이 멀어, 장난처럼 회사를 그만둔 철부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저 혼자만 예상치 못한 현실에 부딪혀 휘청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처에 현실이었다. 그 현실은 돈이었고 경력이었고, 남들의 시선이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고, 나 자신에 대한 자괴와 불신이었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어쩌자고?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을까.
과거의 유령같은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길을 걸을 때에도, 만원 지하철을 타고 학원과 방을 오갈 때에도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 나를 나무라는 내용이었다.
“넌 최악의 선택을 했어. 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넌 뭘 해도 안 될거야. 넌 정말 못생겼어. 넌 매력도 없어. 넌 이제 끝났어.”
내 몸에 달린 수천 개의 귀들이 그 소릴 들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열린 귀는 들려오는 소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수천 개의 귀를 달고 하루 종일 들려오는 그 소리들을 들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