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 번째 방. 시작의 시작
4. 첫 번째 방 - 시작의 시작
첫 번째 방은 대학 졸업 후 취직한 직장 근처에 얻은 주택 3층 월세방이었다. 공덕동 오거리 근처에 있는 후미진 주택가에 에머랄드 빛 플라스틱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던 오래된 집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학생에서 직장인이, 그리고 다시 무직의 수험생이 되었다.
그 방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그 시작의 시작은 너였다. 너를 만난 것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인이 돼 몇 달을 보내고 난 후였던 2005년 4월 27일,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캠퍼스에서였다. 봄바람은 살랑였고, 그 바람을 타고 진한 라일락 향기가 실려왔고,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우연히 마주쳤고,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연히 함께 걸었고, 우연히 바라보다가. 그 우연 앞에 마주한 두 사람을 라일락 꽃향기가 묶었다. 목을 휘감는 꽃향기를 편안하다 느끼며, 봄에 취한 우리는 문득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함께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너는 커다란 나무같은 사람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잎이 순진무구하리만큼 커다랗고 파아란 플라타너스. 아무 생각없이 그저 여름 하늘을 향해 마음 놓고 뻗어나가는 플라타너스 푸른 잎처럼 크고 너른 사람이었다. 그 튼튼한 나무 기둥에 기대, 푸른 이파리에 가려진 너의 하늘을 보고 싶었다. 나는 여름 번개같이 사랑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야근과 주말출근으로 제대로 너의 얼굴을 볼 수 없게되자 나는 다니고 있던 직장을 장난처럼 그만두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플롯포인트를 마주했고, 음흉함을 감추고 짐짓 천역덕스런 행복의 옷을 입고 나타난 선택의 순간에 눈 앞에 놓인 아무 답안지나 들어보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옷을 입고 있던 그 답안지를. 그 답안지 위에는 “회사를 그만둔다.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라고 쓰여있었다. 그 답안지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사랑에 빠졌다. 눈이 먼다. 귀가 안들린다. 연애를 한다. 더 진하게 연애를 한다. 사랑하는 것 외엔 다른 아무 것도 하기가 싫다.”
나는 너와 사랑에 빠져 더 열심히 사랑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던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밥벌이를 한다는 일이 얼마나 시리고 또 시린 일인 줄도 모르고. 학생 신분을 벗어나 취업 준비생으로 살아가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아마도 한 겨울에 내복만 입고 맨발로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처럼 춥고 초라하고 궁색한 일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만큼 난 새파란 청춘이었기에. 너무나 씩씩하고 용감무쌍한,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마음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