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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Mar 03. 2022

설화 소재, <여우>

설화 속 가장 많은 소재 중 하나는 여우.

왜, 하필 여우였을까?

동물원을 포함, 어린 시절에 실제로 여우를 봤던 나는 (그제서야 내가 잡아 먹힐 일은 없겠구나며)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때가 아마도 5, 6학년 정도의 고학년.

하지만, 두려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맘을 휘젓고야 만다.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모르지만, 어린 아이의 간을 약(藥)으로 쓴다며 납치해서 간을 빼간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돌았고, 그 때문에 하교길에 혼자 가는 일은 금기시 되었다. 학교에서는 짝을 지어 다니도록 조 편성을 해 주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이지 않는 적(敵)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늘그렇듯 그런 얘기 속에서는 혼자 다니는 아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내가 그랬다.


"나, 잠깐만 화장실 다녀올게." 좀만 기다려줘. 라는 내 얘기에 철썩 같이 약속했던 친구는 그새 잊어버리고 다른 친구들과 집을 갔고, 어쩌다 돌아오는 주번을 특별한 대가 없이 기다려 줄 친구는 많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때가 되면 2km  정도나 되는 거리를 혼자서 뛰다가 걷다가 눈에선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울며 달리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간을 빼 먹는다는 얘기는 그 뒤로도 한동안이나 나를 몹시 심란하게 했다. 중학 시절쯤이 되어서야 그 얘기를 자연스레 잊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국어 선생님이 들려준 시 한 편에 그날의 얘깃거리가 다시 떠올랐으며 선생님의 섬세함 덕분에 나는 그때의 상황을 조금 어른스럽게 다시 바라볼 수 있었던 거 같다. 그 시를 옮겨본다.


<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님의 <문둥이>라는 시이다.

나는 얼마큼이나 속이 잘 여문 사람이어야, 

문둥이.라는 시어로 이리 아름다고도 찬연하게, 거기에 더해 처연한 슬픔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마음이 심란한 요즘, 설화(에 대한 해석)를 다시 공부하다 보니, 오래된 기억에 상념에 잠기곤 한다.

왜, 하필 여우였을까?

설화 속에서 간(膽)을 빼 먹는 주인공(동물)은 거의 대부분 여우였다.

그것도 어디서 왔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는 누이동생. 

그게 화(化) 하는 것이 여우이고, 그 여우가 간을 내어 먹는다.

줄거리로 보면 그러하다.


오늘 가만히 돌이켜 보니, 산짐승 중에서도 그 크기가 겨우 큰 고양이 정도 밖에 되지 아니하는 여우를 삼은 걸 보면 조상들의 마음이 얄궂다.

그 여우가 화하여 누이가 되고, 그 누이가 간을 내어 먹다니.

이 부분을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어느 날 문득, 그 여우야말로 저 서정주 선생이 얘기하시던 그 문둥이들(혹은 그러한 정도의 중병을 앓던 이들)의 얘기가 아니었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 심한 중병을 앓고 있는데 어떤 이가 지나가는 말(책임지지 아니하는 말)로 아이의 생간을 내어 먹으면 낫는다지... 하는 따위의 말을 흘린다.

절박한 그 사람은 몰래 아이의 간을 내어 먹고 밤처럼 울었다는...게 아닐까?

요, 며칠 전에는 며칠 간이나 달이 참 교결(潔)하였다.

차고 맑은 기운이 가득한 것이 전해오는 말 그대로 항아가 그 속에 살고나 있지 아니할까 하는 정도의...달(滿月).

그 달 밑에 서서 우는 것은 일종의 회한과 회개였을 테다.

아마, 서정주 선생은 그러한 방식으로 '그 삶'을 사는 이들을 풀어내려한 게 아닐까? 저 설화 속에 무수히 등장하는 얄궂은 여우의 운명처럼 말이다.


※ 두서 없더라도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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