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하늘은 푸르렀지

마늘이 싹을 냈다

기억이란 여름철, 멀리 사방산에 내리던 소낙비 빗줄기와도 같다.
이쪽은 날이 쨍쨍한데도, 어느새 개울물이 철철 넘칠 만큼 쏟아져 있곤 했다.

아무런 연상도 없던 어느 날, 그이가 ‘툭’ 던진 한 마디에
그해 여름,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기억이 단비처럼 쏟아졌다.
개헤엄을 치며 겨우 살아난, 그 아득한 한 장면이.

단종 임금이 영월로 처소를 옮기던 중, 잠시 쉬어갔다는 이곳 — 단강.
너무 슬퍼 흘린 눈물이 붉었다 하여, 본래 지명을 버리고 ‘붉을 단(丹)’자를 붙였다고 한다.

숱한 세월이 흐르고, 그날의 아픔을 기억할 리야 있겠냐마는
이름만으로도 느껴지는 애처로운 느낌.
그 강은, 언제 가더라도 늘 그 기운을 확인시켜 주곤 했다.

어느 날, 옛 차부가 있던 끽경자(끝정자)에서
추운 강바람을 맞으며 강가 오솔길을 걷다 보니,
좌우로 푸른빛 아지랑이가 아른거렸다.

그때였다.
마늘이 싹을 냈다.

아침저녁 서릿발이 여전하고, 강바람도 매서웠지만
짚가리 틈 사이로 마늘은 푸른 싹을 잘도 틔워냈다.

밑은 희고, 위로는 노랑을 지나 연두.
가장 끝은 맑은 푸름으로 뾰족하게 빛났다.

그 생명력 앞에 가만히 서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단강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면, 가장 추울 때에야 비로소 봄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 마늘은 매운맛도 매운맛이지만, 어쩐지 단맛이 돌았다.
지명 때문은 아닐까 싶다가도, 아이였던 나는 잘도 그렇게 연상하곤 했다.

된장에 푹 찍어 뜨거운 밥에 올려 먹던 생마늘.
그 아릿한 매운맛 뒤의 단맛은
참으로 인생을 닮았다.

바람이 풀려오고 봄빛이 완연해지면
‘강께밭’에도 푸른 물결이 넘실댔다.

그 즈음이면 아이들의 반찬도 모두 마늘쫑으로 바뀌었다.
고추장에 무쳐 온 마늘쫑.
멸치를 넣은 친구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장맛으로 승부했다.

나는 C가 싸 온 마늘쫑을 참 좋아했다.
“참 맛있다.” 말하면
“에이, 뭘…” 하고 수줍은 척하던 순한 아이.

그 친구도, 나도
별반 다르지 않던, 순둥이들이었다.

마늘쫑을 다 먹고 나면
마늘은 누런 잎을 달고, 낙엽진 나무처럼 변했다.

강께 가는 길,
미루나무가 짙은 푸름을 띠던 그 길을 지나며
마늘을 뽑으러 갔다.

나는 농사라곤 해본 적 없던 아이였고,
마늘밭에서 몇 번 뽑다 뒤로 자빠지기만 하다가
어른들이 저수지로 가서 놀라고 했다.

그 웅덩이는, 큰 비가 지난 후 생긴 곳이었고
햇볕을 받아 따뜻했다.

그곳에서 참방거리다 어느 순간,
몸이 둥둥 떴다.

턱을 넘은 물길에 휘말려
발버둥을 쳐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 살려! 소리쳤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고, 손만 휘저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 죽겠다고!!’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짜내 외쳤을 때,
내 몸을 무엇인가 ‘탁’ 잡아당겼다.

돌무덤.
누군가 미련하게 쌓아둔 그 돌무더기 덕분에
나는 살아났다.

눈을 떠보니, 무릎 정도 깊이.
겨우 몸을 일으키고, 젖은 머리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물이 황토빛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해,
하늘은 참 푸르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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