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30412365

할미꽃의 속마음

할미꽃도 허리를 곧게 펼 수 있다고?!

by 가끔은

내가 처음 할미꽃을 본 건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댁을 가는

길이었다. 시골길을 한참 가다가 낮은 산을 넘으면 바로 외할머니 댁이 나왔다. 외할머니댁에서 시간을 지내다 보면 적응하는 시간이 걸렸다. 맨 처음엔 할머니 방에서.. 건넌방으로… 그러다가 우물이 있던 마당까지 다 돌아다니고 나면 조금씩 땅을 넓히듯 산과 들을 점령하고 다녔다. 급기야 할머니댁에 오는 마지막 코스 산도 한 번씩 살펴보곤 했다. 그때 처음 나는 할미꽃을 보았다. 어릴 때 보았던 할미꽃은 좀 무서워 보였다. 나무들 사이에 덥수룩한 털로 뒤덮여 있는 기분 나쁜 음침한 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기해서 열심히 들여다보긴 했는데, 고개를 숙인 꽃이라는 것 말고는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만났던 할미꽃은 너무 신비로웠다. 이른 봄 많은 꽃이 피지 않았던 때 지나가던 한 정원 잔디밭 한가운데 아침햇살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오묘한 오팔색의 할미꽃.

바로 난 할미꽃을 내 정원에도 심어보리라 다짐했다.


씨앗을 심은 첫 해에는 꽃을 볼 수 없다 하기에 가을에 싹을 틔워 정원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보게 된 할미꽃의 그

오묘한 색을 만나기 위해 추운 겨울 보온에 신경쓰며 자리 잡은 싹들이 죽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새 봄을 맞이했다. 다음 해 싹들은 겨울을 잘 나고 새싹을 내며 몸집을 키웠지만, 내가 만나고 싶은 꽃은 보지 못했다. 많이 실망했지만 정원에서 이런 일은 익히 많이 겪게 되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내년을 기약했다.


유독 비가 많이 오는 장마를 지나고 늦더위까지 다 지켜낸 할미꽃은 올해 멋지게 꽃을 피웠다.


네 개의 싹들은 포기를 키워 몸집이 커졌고 2년의 기다림을(정확히 말하면 1년 반) 위로하듯이 많은 꽃들을 보여주었다. 할미꽃은 꽃잎이 빨간색이었다. 내가 본 오묘한 보라색 또는 오팔색의 할미꽃은 겉에 숭숭 나있는 털 때문이었는데 항상 꽃을 반은 오므린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꽃잎의 뒷면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봄 정원에서 첫 번째 꽃이 이 할미꽃이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의 감동에 뒤이어 다른 조팝나무꽃, 매화꽃이 피면서 잠시 소원해지던 그때 할미꽃이 조금 이상해졌다. 분명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매력이었던 할미꽃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었고, 꽃잎도 한두 개씩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 씨앗을 맺는 모습이구나 싶었다. 나의 예측과 같이 씨앗을 맺고 있는 할미꽃은 마치 자기가 튤립인 마냥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곧 씨앗을 맺었다.

고개를 들고 씨앗을 맺은 할미꽃



제일 예쁜 색을 낼 수 있는 꽃이 필 때는 제모습과 색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할미꽃은 뭔가를 남길 수 있는 때에 고개를 든다.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늘 나에게 큰 교훈으로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건 반대로 씨앗이 익어서 남길 것이 많아지면 내가 여기 있다고 번쩍 손을 들듯이 허리를 펴는 모습..



순간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 고개를 숙일 때인가, 고개를 들어야 하는 때인가,



아니면 난 아직 씨앗 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 새싹도 올리지 못한 무한한 가능성의 상태로 조용히 땅속에서 시간을 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저 이 씨앗 속 어둠을 조금 더 따뜻하게 품어주는 그런 날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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