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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형 Nov 12. 2024

6. 청소와 훌륭한 삶

순간 예찬 일기


  청소를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청소를 하고 싶을 땐 열심히 하고 하기 싫을 땐 한정 없이 미룬다. 그래서 매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치우며 최소한의 청소만 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청소라기 보단 정리다. 나만 이런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지난 일요일 점심을 먹고 난 후 접시를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정리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부엌 타일의 얼룩이 눈에 띄었다. 닦아보니 시커먼 때가 묻어 나왔다. 사고가 정지됐다. 비상이다.  


   당장 정리가 아닌 청소를 시작했다. 왁스물이 적셔져 있는 물티슈로 먼저 손이 닿지 않았던 곳을 닦기 시작했다. 타일, 싱크대 상부장, 하부장을 닦았다. 흰색이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크고 작은 얼룩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한동안 계속 닦았다. 부엌청소를 끝내고 분리수거를 하러 베란다에 나갔다.


   

  비상이다. 베란다의 먼지로 코팅된 회색 빛 바닥을 발견했다. 다시 닦았다. 바닥을 닦고 나서 세탁기도 한 번 닦아줄까 싶어 깨끗해 보이는 세탁기를 닦았다. 번쩍번쩍 깨끗한 세탁기에서 왜 시커먼 때가 묻어져 나오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세탁기도 마저 닦아주었다.


   건조기에서 막 나온 빨래를 개워 옷장에 집어넣으려는데 여름옷과 겨울 옷이 순서 없이 뒤섞여 있었다. 11월이지만 아직 추워지지 않은 날씨 탓을 하며 철 지난 옷들은 깊숙이 넣어 놓았다. 그리고 구석에 숨겨져 있던 옷들을 찾아 개우면서 옷이 이렇게 많았나 생각했다. 옷이 없어 옷을 사려했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옷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소비를 줄여야겠다고도 다짐했다.


   옷을 다 정리하고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치우다가 바닥의 얼룩들을 보게 됐다. 로봇청소기로 닦이지 않은 자국들이다. 기계가 할 수 없다면 사람이 나서야지. 벅벅 바닥을 닦았다. 드디어 청소가 끝났나 싶어 허리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는데 문고리의 얼룩이 보였다. 문짝을 모두 닦았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거울을 본 순간 거울도 닦게 됐다. 평소엔 눈에 잘 안 띄었는데 청소하려고 마음먹으니 하나씩 청소할 곳이 늘어났다.


   (글을 쓰면서 숨이 찬 적은 처음인데, 정말로 숨이 차오른다.)


 쉴 새 없이 청소를 하고 나니 밤이 되었다. 집도 깨끗이 청소한 김에 저녁을 건강한 메뉴로 차려먹었다. 부모님이 주신 표고장과 부추장에 밥을 비비고 도라지 무침과 오이소박이를 내왔다. 간단히 계란국도 해서 같이 먹었다. 그리고 소화시키러 산책을 나섰다. 한 시간 정도 걷고 들어와서 다음날 입을 옷을 미리 꺼내 놓았다.


  

  청소 한 번 했을 뿐인데 내 일상이 정돈된 것 같았다. 보다 더 멋진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때 떠오른 구절이 있다. 톨스토이의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일상적 노동은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한 발판이자 꼭 필요한 요소임을 다시금 상기했다. 일상적 노동은 훌륭한 삶을 위한 마중물이다. 자 이제 훌륭한 삶을 살아볼까!


톨스토이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적 노동을 무시하고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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