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예찬 일기
매일 짧은 일기를 쓰고 있다. 오늘도 회사에 출근해서 일기를 써 내려가는데 문득 내가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같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행복했다. 항상 내 꿈은 밝고 명랑하고 글을 잘 쓰는 문학소녀 주디였다. (물론 키다리아저씨와의 결혼까지 포함이다.)
일기를 매일 쓰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묶고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것 만 같다. 글이란 참 좋다. 터무니없는 상상이 그림처럼 선명히 그려진다. 피터팬증후군에 걸린 것처럼 항상 동화 속에 살고 싶은 나에게 제격인 취미다.
어제는 11월 치고 정말 많은 눈이 내렸다. 기사에서 보니 11월에 이렇게 많은 운이 내린 건 117년 만이라고 한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하지 못할 뻔했다니! 우리 집은 북한산인데, 사계절의 풍경이 모두 아름답다. 그리고 눈이 오면 유독 더 아름다워진다. 하얗고 하얀 설경이다.
나뭇가지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고 창가에는 녹아내린 눈이 얼어 고드름이 매달려있다. 길목에는 군데군데 귀여운 눈사람이 서있다. 다른 이의 동심을 빌려 나도 마음을 훈훈히 데울 수 있다.
빌딩들이 많지 않은 주택가라 출근길에는 치워지지 않은 눈을 밟을 수 있다. 이전의 모습이 어떠했든지 하얀 눈으로 가려진 깨끗한 길 위에 첫발을 뗄 때의 기분이란! 깨끗한 곳에 내 흔적을 남긴다는 장난스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사실 처음 든 생각은 출근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었지만, 곧 잊어버리곤 즐겼다. 하루 출근 늦는다고 세상이 무너질까!)
눈은 왜 예쁜 걸까? 온 세상의 채도가 빠져나가는 무채색의 겨울을 하얗게 꽃 피워서일까? 그래서 우리는 조명으로라도 겨울 세상을 장식하는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하얀 나무 사이를 거닐고 싶다. 밝게 빛나는 풍경과 하나 되어 발 밑에서 뽀드득 거리는 눈을 만끽하고 싶다. 눈이 녹아 사라지기 전에, 세상의 더러운 때가 묻기 전에 잔뜩 시새우고 싶다.
오늘도 풍요로운 인생을 만들기 위해 행복한 순간을 더해간다.